<가면>이라는 것

2019.09.18 06:02

어디로갈까 조회 수:647

1. 세상엔 정해진 가면들이 있습니다.  어떤 가면들은 너무 흔한 것이어서 전혀 위험하거나 불온하게 생각되지 않죠.
너무나 많은 사람이 쓰고 있어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교류하는 법까지 세상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정해준 가면을 쓰면 비교적 정직하다는 평을 듣죠. 그런 가면은 삶의 안전을 위한 일종의 규칙 같은 것이므로. 
심지어 '쓰지 않으면 너의 피부를 벗기리라'는 경고훈이 있는 지경입니다.

2. 가면을 왜 쓸까요?  세상이 주는 돌연한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게 한 이유인 것 같긴 합니다. 그런 가면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은폐시키는 것이겠죠. 가면으로 감정과 사고를 가림으로써 '나'의 내부가 '나'에게만 감지되는 고독한 자유를 얻는 덤도 있고요.
그러나 그 자유란, 세계와 나의 직접적 교류를 끊임없이 유보하는 좁은 우물이기도 한 거라고 생각해요.

3.때로 아주 낯선 가면 앞에서 당황합니다.  낯선 것도 실은 저 흔한 가면에 대한 진부한 반역과 변형에 불과할 뿐인데도. 진정으로 낯선 가면은 절대 감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다른 세계의 방식일 테니까요.
(뻘주: 제게 조국/김어준의 가면은 익숙한 것인데 최근 유시민의 가면은 아주 낯설어요. - -;)

4. 때때로 우리는 약속과 준비를 거쳐 동시에 모두 가면을 벗고 얼굴을 노출시키며 서로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벗은 가면 뒤에서, 은연중에 감지했거나 상상했던 상대방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던가요? 그의 깊은 곳에서 일고 있는 떨림이나 혼돈이 보이지 않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던가요?

5. 언젠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그것을 벗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면을 쓴 기억이 없는 저에겐 그것을 벗을 힘이 없었어요.
그래요. 가면을 쓰지 않았다 해도 우린 한 얼굴이 숨긴 깊이의 끝에 가 닿을 수는 없습니다. 가면은 가면 뒤에 진정한 얼굴이 있다는 착각을 위해 존재합니다.

뻘덧: 어제 dpf와 나눈 대화 한토막. 
"요즘 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실눈을 뜨고 사람들을 봐. 그거 일종의 소심한 가면인 거 알아?  자기보호본능으로서의 기본적인 기능 뿐인 가면." 
-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실눈에는 오랜세월 바람과 햇빛에 단련된 자의 강인함이 있지.ㅋ 
릴케였나?  무서울 정도로 차례차례 재빨리 얼굴을 바꿔 결국 낡아 버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고 갈파했지. 
희미한 기억인데 이런 말도 덧붙였어. 그런 사람은 최후의 얼굴을 혹사시켜 결국 그 얼굴에 구멍이 뚫리고 차츰 얼굴도 아무것도 아닌 민둥민둥한 표면을 하고 돌아다닌다고. 그 무서운 예언을 잊고 있었는데 니가 기억나게 해주네. 

1-maske.jpg2-maske.jpg0-maske.jpg5-maske.jpg3-maske.jpg4-maske.jpg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09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63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575
109684 오늘의 잡지 화보 (스압) [2]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09.18 370
109683 웹소설 판의 추석 풍경 [4] Journey 2019.09.18 436
109682 [넷플릭스바낭] 장안의 화제작(?)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다 봤습니다 [9] 로이배티 2019.09.18 1315
109681 댓글 찾는방법 [4] 샤넬 2019.09.18 437
» <가면>이라는 것 [14] 어디로갈까 2019.09.18 647
109679 고레에다 감독의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들> 중에서, 그리고 최근의 일본 영화 경향 [10] 보들이 2019.09.18 782
109678 <벌새> 작년에 봤던 기억을 더듬어 후기 [1] Sonny 2019.09.18 518
109677 섬에 다녀왔습니다. [4] 칼리토 2019.09.18 469
109676 기득권의 어둠과 촛불 [21] Joseph 2019.09.17 961
109675 연인 The lover(1992) [7] zla 2019.09.17 1460
109674 저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봤습니다. [5] McGuffin 2019.09.17 1438
109673 직장에서 너무 한가해도 이상해요. [5] 산호초2010 2019.09.17 1020
109672 쫄리면 뒈지시던가... [12] 도야지 2019.09.17 1585
109671 가자! Jk !! [6] 샤넬 2019.09.17 916
109670 오늘의 만화 엽서 [2] 파워오브스누피커피 2019.09.17 268
109669 착한’ 피의사실공표, ‘나쁜’ 피의사실공표 [1] Joseph 2019.09.17 896
109668 이런저런 일기...(조양, 낙조) [1] 안유미 2019.09.17 536
109667 한국관광경쟁력 세계16위?!? [4] ssoboo 2019.09.16 1030
109666 삭발 문화 [4] 어제부터익명 2019.09.16 977
109665 나라가 망한다. [3] 샤넬 2019.09.16 100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