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갈까

2019.10.20 11:07

Sonny 조회 수:757

삶에서 목적지를 고민할 일은 많지 않습니다. 미리 정해진 약속들은 도착해야 할 곳을 으름장처럼 각인시켜놓죠. 몇시까지는 어디로, 누굴 만나기 위해서는 어디로, 뭘 듣기 위해서는 어디로. 장소에 대한 고민 전에 우리는 책임을 제 때에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합니다. 가야 하고, 다행히 왔고. 이 사치스런 고민은 대개 여행 중이거나 갑자기 목적이 사라져버렸을 때만 작동하죠. 그럼 어떻게 하지? 느낌표가 없이 삶을 유영할 수 있는 것도 낭비의 기회입니다. 때로는 여행에서조차 이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게 철두철미한 의무 사이에서도 삶은 헤맵니다. "앞으로" 라는 미래시제가 붙으면 우리는 간다는 확정 대신 질문을 하게 되요. 어디로 가야할까. 거기로 가도 되는 것일까. 손석희 아나운서는 가호지세라는 말을 썼습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처럼 두려움을 꽉 깨물고 질주하리라고. 하지만 모두가 결연하게, 후회없이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망설이고 두려워해야 해요. 어떤 이정표는 사실 누군가 화살표를 거꾸로 돌려놓은 것일테고 어떤 표지판은 이미 없어진 길일 수 있고. 그래도 짐짓 대범한 척 발걸음을 옮깁니다. 삶이 성큼성큼 소리를 낼 때마다 아래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는 꼿꼿이. 한번이라도 시선을 돌리면 후회나 망설임이 엄습해버릴 것처럼. 그런데요. 하루종일 전진하는 게 삶이 아니란 게 문제입니다. 밤이 되면 멈추고 우리는 눕습니다. 대개 어둠은 아무 것도 대답해주지 않고, 간절한 질문들을 꿀떡 삼켜버리죠. 눈을 감고 자문자답의 방황을 시작해봅니다. 어디로 갈까. 수많은 지도를 들고 현재로부터 미래로의 선을 그어보지만 무엇 하나 하이라이트로 빛나질 않아요. 의문문 뒤의 물음표는 탄력을 잃고 질문자 곁에 함께 쓰러집니다. 어디로. 그런데 가긴 가는 걸까. 물음표 마지막에 찍는 점은 튀어오르는 고무라고 생각했는데, 선이 되지 못하고 흘러내릴 우유부단함일지도 모릅니다. 모르겠어서, 우리는 물음표처럼 침대 위에서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몸을 구부립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씁니다. 정렬된 무형의 선 위로 정갈하게 나열되는 글자들은 그 자체로 길이 됩니다. 어디론가는 가고 있어요. 알맹이가 헤맬 지언정 문자라는 껍질은 또렷하게 선을 이어가요. 어디로 가냐구요. 저 오른쪽, 맨 아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얼마나 길게 갈 지는 모르겠지만, 최후의 마침표는 여하튼 문장 아래에 놓일테니까요. 여기까지. 멈추지 않는 삶 속에서 우리는 잠이라는 잠깐의 안식 뒤에 또 눈을 뜨고 숨을 뱉으며 하루를 이어가야하지만 글은 거기서 끝입니다. 시간을 초월해서 저마다의 완결을 박제하는 기록들. 어디로 갈 지 그 고민이 끝맺음을 만날 수 있는 행위들. 목적이 없어도 좋아요. 글은 헤매일 수 있는 자유니까요. 어릿광대의 기억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로, 추상과 관념으로 글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순간 질문에 맞닥뜨리고 설렙니다. 삶은 정녕 가는 것인가. 결단코 순환하지 않는 일방향의 시간 속에서, 왜 누군가의 글은 삶이 부유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시간의 대지 위에 자국을 남기고 출발점으로부터 한없이 멀어지는 것만을 계획한 우리가,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기억을 소재삼아 재구성된 그 글 속에서, 분명 사회의 규칙을 따라 오른쪽 아래로 시선은 향하고 있는데 왜 의식은 언어 위를 떠다니고 있는가. 어떤 글은, 무중력을 부여합니다. 


새삼 깨닫습니다. 가벼워진 의식을 글 속에 내던지면서, 제약을 푸는 열쇠는 어떤 언어의 세계에 숨어있다는 걸. 깃털처럼 가볍게, plume처럼 삶의 무게를 희롱해요. 나는 지금 돈도 내일도 감히 고민하지 않고 유익과 유의미를 찾아 놀고 있다고. 그리고 상상합니다. 지구가 도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자전의 소리와 공전의 소리는 따로따로 나는 것일까요? 지구는 묻지 않겠지만 그 넓디넓은 행성에서 저는 한가롭게 묻죠. 어디로 갈까. 분노와 정의가 진격을 명할 때, 저는 눕되 쓰러지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혼자 중얼거립니다. 어디로갈까. 글이 또 올라오면 쓰여진 글들을 밟으며 저의 의식은 둥실거리겠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32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686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014
124526 문재인은 부엉이 바위 안가나요? [50] 방드라디 2013.01.09 6801
124525 MBC 8시뉴스, 문재인 의원 사진을 범죄자 실루엣으로 사용 [9] 그리스인죠스바 2013.02.08 6800
124524 [듀나인] 종로3가 금은방거리에 가면... 눈뜨고 코베이나요?!! [11] 이요 2012.05.16 6800
124523 요즘 섹시한 노래가 좋아요 [33] art 2010.06.14 6798
124522 연애에 실패한 남자들 [49] 부기우기 2011.05.12 6796
124521 동성애자분들에게 고백합니다 15금이려나요...(원하지 않는 분은 읽지마세요) [14] 연금술사 2012.09.05 6795
124520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자살 시도로 입원. [13] mithrandir 2011.07.01 6795
124519 엄태웅 예비 신부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윤혜진이네요 [8] 감자쥬스 2012.11.04 6794
124518 엔하위키질을 하다가;콩쥐팥쥐의 진짜 결말 [23] 메피스토 2013.01.23 6793
124517 섹드립과 성폭력(저질 19금 비속어 주의?) [48] 知泉 2013.03.22 6792
124516 이건 스컬리 답지 않아요. 나다운 게 뭔데요, 멀더? [30] lonegunman 2013.02.01 6792
124515 네네치킨 어때요? [14] 산호초2010 2010.08.09 6792
124514 네오 이마주 성추행 사건 [31] 로이배티 2011.08.10 6790
124513 [공지] "조용기 목사 매독 사건(?)은 사실로 봐야하는 겁니까" 게시물을 삭 제했습니다. [13] DJUNA 2014.11.15 6789
124512 소녀시대등 심심풀이 SM 걸그룹들 외모와 스타일링 알아보기. [8] Fmer 2010.08.19 6789
124511 [방자전] 보고 왔어요. [2] 아.도.나이 2010.06.03 6789
124510 정신적으로 성숙한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51] 비글개스누피 2013.06.11 6787
124509 배현진 아나운서의 입장표명글 [28] 메피스토 2012.05.29 6787
124508 김종학 PD 사망했다는 속보가 뜨고 있습니다 [9] nixon 2013.07.23 6785
124507 임스 라운지 체어 이쁘네요. 하나 살까... [5] 데메킨 2012.11.28 678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