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메일을 읽고 심란해서

2019.12.01 11:04

어디로갈까 조회 수:1392

- 어느 사람이 어떤 주장을 했을 때, 누가 찬성을 해주면 전진을 재촉할 것이고 누가 반대하면 분발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찬성도 반대도 없는 경우, 자신이 버려진 것 같은 서글픈 느낌, 이것이 적막이다. 
책의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루신의 글인 건 분명합니다. 

새벽에 한 친구가 오랜만에 보낸 안부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를 설명하려니 `적막'이란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적막' 이란 이미지를 담은 광고를 만들 때 모델로 쓰면 딱 알맞을 그런 분위기의 사람이고, 그런 환경의 삶을 살았습니다.
남보다 그 체온이 일도쯤 낮을 듯싶은 느낌을 주는 서늘한 무표정, 주어진 시간을 염소처럼 뜯어먹고 있을 뿐이다는 자세로 일관하는 무의욕, 그러면서 비상시엔 맨 먼저 주변 사람들의 괴로움과 슬픔에 제 존재로 쿠션을 대는 돌연한 따스함.  (그런 순간에 그를 가두고 있는 '슬픔의 집' 이 선명하게 잘 보여요.)  

그는 일본인이고 저보다 두 살 아랩니다.  그를 대면한 건 스물여덟살 때 밀라노에서였지만,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어릴 때부터 알면서 자랐어요.  그의 아버지와 제 아버지는 민족감정을 넘어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고, 두 분이 주고받는 편지나 사진에 단무지나 깍두기처럼 묻어서 우리의 모습들이 바다를 건너 다녔습니다.
밀라노의 한 식당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생명'이라고 느낄만한 에너지가 결핍돼 있다는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어요.  알고보니,  그 일 년 전에 그는 삶에서 참담한 불행을 경험했더군요.

태어난 이후 가장 큰 기쁨이었던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통고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조용하나 확고하게 반대를 하고 나섰다고 해요. 여자의 무엇에 그의 아버지가 멀미를 일으킨 것인지는 말해 주지 않아 모릅니다.
사람은 어떤 모욕에 마음을 부서뜨리고 나면 십 층 정도의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방법으로 자신에게 화를 내게 되는 것일까요.  그의 여자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충격의 무감각을 뚫고 그에게 가장 먼저 온 것은 분노였다고 해요. 분노의 촉은 그들의 결혼을 무섭게 반대한 아버지가 아니라 여자를 향해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포기해버린 것에 대한 분노가 슬픔보다 강했고, 그 인식이 그녀의 죽음만큼 그를 절망케 했다더군요. '내 사랑을 그토록 무기력한 것으로 느꼈다는 말인가?' 

사랑을 잃고 마침표로서 그렇게 중얼거리는 자신의 에고와 마주치고 나서 사랑에 대한 그의 견해는 완전한 전복을 겪게 됩니다.
현재 그는 다섯 살 연상의 이탈리아인과 결혼해 살고 있어요.  사랑으로 묶인 관계가 아님을 부부는 스스럼없이 주위에다 설명하곤 해요.  삼년 전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엄마의 유전자를 구십 퍼센트쯤 물려받은 딸과 악수를 나누는 제 등에다 대고 그가 중얼거렸죠. " 동물의 번식 능력은 놀랍고 신기하지?"
( 그무렵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거울과 성교는 모든 사람의 수를 두 배로 만들기 때문에 끔찍하다"는 글을 읽었던 터라 흠칫했던 기억이. - -)
그의 결혼이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싶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런 선택이 필요할 정도로 삶이란 난해한 것이라고 납득하게 됐으니까요.

"What do you expect in your life? "
편지 말미에 그는 제게 물었습니다.  실은 노래의 후렴처럼 편지의 끝마다 적혀 있는 문장이에요.
이 질문은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자신을 향한 것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계속 살아가고 싶어서 타인을 향해 그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5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6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6015
110748 [바낭] 90년대 라디오 '영화음악실'의 단골 레퍼토리들 몇 곡 [32] 로이배티 2019.12.19 964
110747 콰이어트 플레이스 2가 나오네요 [4] 부기우기 2019.12.18 535
110746 샘 레이미의 기프트 [3] mindystclaire 2019.12.18 613
110745 사라진 밤 [8] 어제부터익명 2019.12.18 651
110744 ssoboo 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합니다. [7] 2019.12.18 1556
110743 이세돌이 인공지능 상대로 1승을 추가했군요 [5] 부기우기 2019.12.18 759
110742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 [4] 귀장 2019.12.18 3860
110741 사람을 바꾸려는 시도 [3] 예정수 2019.12.18 653
110740 [회사바낭] 종합편 [5] 가라 2019.12.18 568
110739 2019 San Francisco Film Critics Circle Award Winners [5] 조성용 2019.12.18 435
110738 60년대 배우들 [5] 가끔영화 2019.12.18 477
110737 게시판 관리자 님께. 게시판 규칙 (7)번에 의거하여 ssoboo 를 퇴장 시켜주시기 바랍니다 [44] 2019.12.18 2031
110736 오늘의 스누피 겨울 엽서 [4] 스누피커피 2019.12.18 770
110735 글짓기는 넘넘 힘들어~ [6] 어디로갈까 2019.12.18 723
110734 김혜리의 필름클럽 100회 업데이트 [2] 예정수 2019.12.18 613
110733 크리스마스 가족 영화의 결정판은 바로... [3] 조성용 2019.12.18 819
110732 포드 VS 페라리를 볼만한 4dx 관을 찾기 어렵네요 [3] 산호초2010 2019.12.17 383
110731 좋아하는 여성보컬 노래 5곡 [2] sogno 2019.12.17 480
110730 이번 부동산 정책은 반발이 크지 않을까 생각 되네요 [9] wagoo 2019.12.17 1117
110729 [넷플릭스바낭] 도대체 본 사람은 있을까 싶은 불량영화(?) '걸하우스'를 봤네요 [6] 로이배티 2019.12.17 73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