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영화

2020.03.04 16:21

Sonny 조회 수:494

저번주 일요일에 셀린 시아마의 <워터 릴리즈>를 보았습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 주 주말쯤에 정리해서 올릴 거구요. 일단은 다른 이야기들만 좀 하고 싶네요. 저를 사로잡았던 건 이 영화가 필름 영화라는 점이었습니다. 원래도 필름의 질감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번처럼 필름영화에 빠진 적은 처음입니다. 이 영화가 아주 특별해서 그런 건 아니고 필름의 아름다움이 갑자기 찾아온 느낌이었습니다. 가끔씩 생기는 그 노이즈와 거칠은 입자들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영화는 필름이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마저 들더군요. 디지털의 편의성과 경제성을 어찌 무시하겠습니까만은. 


레트로 감성이 도져서 그런 걸까요? 필름은 기본적으로 구식 기술이고 과거를 그리는데는 최적의 재료입니다. 필름으로 뭘 찍기만 하면 자연스레 그냥 옛스런 느낌이 묻어나옵니다. 물론 <소셜 네트워크> 같은 영화를 필름으로 찍으면 좀 괴상할 것입니다. 그 영화는 현재에서 미래로 도약하고 테크놀로지에 대한 영화니까요. 핸드폰이 나오기 이전의 시대를 필름으로 찍으면 딱 좋은 것 같습니다. 60년대나 70년대 영화들도 나름 필름의 맛이 있긴 하지만 뭔가 그리운 느낌은 안들어요. 아마 제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시절이 필름에 걸쳐있어야 혼자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갑자기 디지털에 대한 혐오가 치솟네요. 마블 영화들을 보면서 역겨웠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화면만큼은 진짜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면서는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화면은 인스타스럽게 이쁜데 아련한 느낌은 별로 안들어서 좀 팬시하다는 느낌만 받았거든요. 좋아하는 필름 영화가 뭐가 있더라... 좋아한다고 하는데 말은 못하는 이 건망증! 갑자기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의 황혼>이 떠오르네요. 


영화는 미래를 그릴 수 있습니까? 미래라는 시간은 아직 가보지 못한 점이고 꿈 혹은 희망으로 이야기의 바깥에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야기든 일단 그려놓고 보면 그것은 무조건 현재의 시간을 띄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미 그려져버린 미래는 현재이자 과거로 빠르게 퇴색해가며 "미지"라는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제 개인적으로 여기에 그나마 분전을 펼쳤던 영화는 <빽 투 더 퓨쳐2>와 <라라랜드>였던 것 같아요. 영화가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우리가 기억을 되돌려보는 형식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과거지향이 될 수 밖에 없는 숙명이라면, 영화는 필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워터 릴리즈>가 필름으로 담아낸 청소년기의 그 불안과 우울은 재료 자체를 닮아있는 것 같았습니다. 명백하게 깔끔해질 수 없고 아무리 즐거운 와중에도 노이즈가 끼어들 수 밖에 없는, 디지털이 되지 못한 아날로그의 미숙한 감각 말이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1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2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921
112000 아이들은 어떻게 악(?)해졌을까. [16] 잔인한오후 2020.04.07 1650
111999 [벼룩] 책 벼룩과 나눔 [4] 허걱 2020.04.07 716
111998 버섯 종균 기능사 실기 [3] 칼리토 2020.04.07 1259
111997 재활용 짜증... [14] 노리 2020.04.07 1405
111996 이런저런 일기...(시간의 축적) [2] 안유미 2020.04.06 558
111995 사랑하는 대상이 어떤게 있으신가요? [6] 호지차 2020.04.06 906
111994 [코로나19] 미국놈들 양아치 짓 하다 딱 걸림 [6] ssoboo 2020.04.06 1710
111993 권태기와 탈정치, 동기부여 외 [3] 예정수 2020.04.06 436
111992 [넷플릭스바낭] '바이올렛 에버가든 - 영원과 자동 수기 인형'을 봤습니다 [10] 로이배티 2020.04.06 1483
111991 다시 음모론이 횡행...하는 세상 [11] 왜냐하면 2020.04.06 1316
111990 마흔살이 두번째 스무살이긴 한데 [2] 가끔영화 2020.04.06 620
111989 미래통합당 김대호 후보, 3040 비하발언 논란.. [20] 가라 2020.04.06 1316
111988 [일상바낭] 어린이집 휴원 6주째 [6] 가라 2020.04.06 877
111987 김어준의 n번방 음모론 [16] 도야지 2020.04.06 2132
111986 내가 왜 정의당을 혐오하는지 문득 깨달았어요 [38] 도야지 2020.04.06 1490
111985 (바낭) 허경영 당 [8] 보들이 2020.04.06 699
111984 도대체 황교안은 정체가 무엇인가... [5] MELM 2020.04.05 1238
111983 [코로나와 총선 D-10] 선관위에서 봉투가 왔는데 [5] ssoboo 2020.04.05 779
111982 넷플릭스-타이거 킹 보셨나요? [3] theforce 2020.04.05 982
111981 [넷플릭스바낭] 아담 샌들러의 '언컷 젬스'를 봤습니다 [12] 로이배티 2020.04.05 85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