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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트위터에서 팔로우하고있던 "트친"님의 책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따로 전문적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저 그림이 좋다는 이유로 독학과 무던한 훈련을 통해 그림을 연습하던 그가 트랜스젠더로서의 일기를 이렇게 만화 형식의 책으로 출판까지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자살충동의 숱한 고백과 어설프던 그림의 나날을 쌓아가며 마침내 책까지 낼 수 있게 된 그의 끈기와 생명력이 이렇게 결실을 맺은 것에 놀라울 뿐입니다. 그의 이 동화적인 그림이 어떤 고통과 부침을 겪어왔는지 알고 있는 저에게는 이 책이 그저 귀여운 책이 아니라 지난한 투쟁의 역사같습니다.

그의 책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의의는 이 책이 트랜스젠더를 이해하는데 "쉽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쉽다는 것을 내용의 부실함이나 단순함으로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으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책은 쉬워야하고 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일반 대중, 비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를 인식하는 정도가 지극히 편협하고 아주 제한적이거나 자극적인 이미지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상당수의 트랜스젠더 혐오는 해소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이 "쉽다"는 것은 학술적이거나 논설적인 대신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이것은 아주 "편안한" 책입니다. 반대진영에 싸우자고 하거나 의견들을 부정하는 대신 트랜스젠더로서 나는 이런 고통과 열망을 갖고 있다는 이 글은 일기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타인의 일기를 읽는 것은 개인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는데 용이합니다. 트랜스젠더도 한 명의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그의 일기 속에 드러난 감정들을 통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교화적 내용들은 다른 책들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에서 더 인상깊게 봤던 것은 트랜스젠더로서의 존재와 고통을 설명하는 그의 그림 세계입니다. 그림 속 화자가 왕관에 긴 머리를 하고 있는 이유는 화자(이자 작가)인 데이지가 sns에서 좋아한다고 늘 밝히던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게임에 나오는 데이지 공주를 오마쥬하고 있습니다. Girl이자 Princess로서의 자아를 그림으로 나타낸 그의 모습은 "Girls do not need a prince"의 페미니즘 표어와도 묘하게 겹치는 구석이 있습니다. 화자의 이 모습에서 시작되는 이 그림일기는 남성들의 모험담이었던 슈퍼마리오 서사를 트랜스젠더이자 여자인 자신이 도전하는 또 다른 서사의 가능성을 상상케합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들과, 그로 인해 얻는 소소한 즐거움과 곤란을 이야기합니다. 게임은 남자들의 세계라는 편견의 세계에 데이지 공주가 모험을 하듯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의 동글동글하고 동화적인 그림체에서도 투쟁의 다른 가능성을 엿보니다. 강하고 전투적이고 상대와 똑같이 악랄해지는 "터프"한 투사적 이미지들만이 반드시 정답일까요. 근육과 짧은 머리로 상징되는 육체적, 자본주의적 강자의 이미지는 역으로 그런 남성성의 획득과 표현만이 유일한 길이며 그것이 역으로 여성성을 부정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투쟁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외부의 억압에 절대 굽히지 않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가장 솔직하고 자기답게. 이것이 "여자다운 여자"에 맞서는 페미니즘의 의제와 그대로 통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귀엽고 아이같은 것이 꼭 나약한 것인지, 그것이야말로 안티 페미니즘이 표방하는 마초적 이미지와 통하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됩니다. 이 귀여운 그림체로 그는 몇번이나 죽을 뻔했던 외부와 내부의 시련을 이겨냈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외양으로는 내면을 절대 파악할 수 없다는 그 단순한 진리를, 페이보릿 데이지는 자신만의 이상적 세계에서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그의 투쟁에 대한 초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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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를 오해하는 가장 큰 항목 중 하나입니다. 글쓴이 데이지는 이것을 나레이션 형식으로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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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를 향한 사회적 폭력이 동성애자들을 향한 폭력과 그대로 닮아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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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를 오해하는 사람들조차도 기형적이고 왜곡된 형상으로 그리는 대신 명탐정 코난의 그림자 인물처럼 표현한 것에서 그의 선의와 끈기를 발견할 수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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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똑같은 구석을 가지고 있어서 매우 반가웠던 부분. 어차피 맛이 상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남들한테 외면받는 게 안타까워서 찌그러진 음료수 같은 것들은 일부러 사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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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취향으로 만들어진 스티커. 일일이 잘라지지 않은 점은 아쉽네요.

세계에서 제일 친절하고 귀여운 트랜스젠더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더 많은 이들이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이 없을 때, 혹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편견으로 혼란스러울 때 그저 재미로라도 접근해볼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세계가 더 바뀌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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