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 를 읽고 - 1

2020.08.05 13:36

Sonny 조회 수:1303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의 수기를 직접 읽는 것은 충격을 안겼습니다. 일단 피해자 본인의 언어로 재현되는 성폭력 피해의 충격이 있었습니다. 이미 그의 jtbc 인터뷰를 봤는데도 그의 책에서 동일한 내용을 접하는 것은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김지은씨의 책은 다른 언론이나 어떤 필터도 통하지 않고 그를 단독으로 마주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을까요. 그는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나쁘다"고 하는 건 오히려 그에 대한 몰이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김지은씨가 서술한 안희정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사극어체와 같은 안희정의 말투는 단순히 싫은 정도를 떠나서 기괴한 불쾌감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것을 우스꽝스럽다며 짜증을 섞어 풍자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우리와 달리, 이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안희정의 실무진들과 김지은씨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울지 상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차마 비웃지도 진저리내지도 못하고 그것을 그저 당연하게, 아주 현실적인 압력으로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 환경은 그야말로 봉건사회의 계급제를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누군가의 자아도취를 차마 깨트릴 수 없이 충성해야 하는 삶. 희극을 희극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극으로 악순환시키는 그 환경이 안희정의 권력이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다. (저는 제 블로그에 문재인 다음 대통령 후보는 다른 유력한 후보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 거의 무조건 안희정이 될 것이라는 예상글을 썼다가 지운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 권력과 그 밑에 조아리는 사람들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었어요)


김지은씨의 이 고백은 성폭력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괴팍한 직장 상사와 그것을 견고히 유지시키는 한국의 조직 문화에 대한 고발같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폭력은 이런 문화여야 가능한, 철저히 계급적이고 권력을 향유하는 폭력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성폭력을 야만적이고 짐승같은 무엇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약하고, 하급자는 상급자보다 약하고, 강자가 이런 말과 요구를 해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가운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점점 학습해나간 결과가 바로 성폭력입니다. 성폭력은 엄청나게 사회적이고 고도화된 폭력입니다. 성폭력을 하나의 문화이자 여흥으로 배우게 되는 이 폐쇄적 세계에서 여성들이 남성 상급자로부터의 성폭력에 어떻게 대항해야할까, 하는 고민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남자 하나를 족친다고 될 일이 아니라 "남자"왕은 이래도 된다는 무의식적 가르침이 사회 전반에 펼쳐있는 것이니까요.


김지은입니다를 읽으면서 성폭력을 인식하는 확실한 논리구조를 배웠습니다. 성폭력은 귀납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왜 여자는 저항하지 않았지? 남자가 저렇게 나쁠리가? 무슨 거짓말이 있는 거 아닐까? 그 모든 이야기가 다 무의미합니다. 성폭력은 남자가 여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지시를 하면 여자가 거기에 따를 수 밖에 없는 단 하나의 대답만 있는 과정을 거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육체적 완력일 수 있고 직장에서의 권력일 수 있고 많은 남자들이 성폭력을 당연시하는 문화일 수도 있습니다. 여자의 증언과 진실에서부터 성폭력은 왜 그렇게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필연성을 따져봐야 하는 일입니다. 군대에서 남자 고참이 뺨을 때렸을 때 "그렇게 손이 빨랐어?" "뺨을 때리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어?" "반사신경만 있다면 피할 수 있지 않았어?" 라고 말하지 않듯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 물리적 성폭력을 남자가 어떻게 저질렀는지 있는 그대로 그 권력구조와 남자의 마비된 양심을 추론할 일입니다. 성폭력의 진실은 그 남자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기정사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거기에 진실이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0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1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906
113235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2] 조성용 2020.08.25 537
113234 [바낭] 코로나 시대의 수영, 자꾸 헤어지는 사람들. [8] applegreent 2020.08.25 706
113233 Allan Rich 1926-2020 R.I.P. [1] 조성용 2020.08.25 241
113232 오늘의 일기...(제육볶음, 테넷, 술) 안유미 2020.08.25 396
113231 천재는 취향을 넘어서는 뭔가 있는거 같아요 - 유툽 ‘과나’ [6] ssoboo 2020.08.24 1220
113230 행복의 나라 한대수 가족이 궁금해서 [3] 가끔영화 2020.08.24 587
113229 훠궈와 마라샹궈의 차이가 [5] daviddain 2020.08.24 710
113228 대박영화 극한직업 보려는데 볼까요 두분만 리플 부탁 [3] 가끔영화 2020.08.24 397
113227 8월 24일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입니다 모르나가 2020.08.24 326
113226 넷플릭스에서 <특별시민>을 보았습니다 [6] Sonny 2020.08.24 785
113225 중드 장야 시즌1 감상+일상 잡담 칼리토 2020.08.24 936
113224 듀게 오픈카톡방 [2] 물휴지 2020.08.24 216
113223 [넷플릭스바낭] 국내산 호러 앤솔로지 '도시괴담'을 봤어요 [6] 로이배티 2020.08.24 572
113222 오늘의 일기...(소소한 한끼, 테넷, 어린 녀석들과 돈) 안유미 2020.08.24 524
113221 정경심 재판 왜냐하면 2020.08.24 565
113220 지금 코로나가 신천지 때보다 더 위험해 보입니다. [23] 분홍돼지 2020.08.23 1578
113219 여러분이 과학시간에 본 영화는 무엇인가요 [13] 부기우기 2020.08.23 585
113218 코로나;더 강경한 대응책이 필요할 듯 합니다 [4] 메피스토 2020.08.23 839
113217 River를 시작했는데 [6] daviddain 2020.08.23 410
113216 그냥 티셔츠 하나 입었다고 조이가 이기적이라고 하는 이슈 유튜버 [8] 하워드휴즈 2020.08.23 99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