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10분을 보는데 웃음이 나더군요. 이 영화가 <달콤한 인생>이랑 뭐가 다른 것일까요. 소재를 한국 정계 개편의 역사에서 가져왔을 뿐 구도는 완전히 흡사합니다. 그래도 매너있고 상식있는 깔끔한 2인자가, 무례하고 세상을 망치는 폭력적인 3인자에게 점점 밀려나고 보스의 총애도 잃어가면서 돌아버리는 이야기를 그렸으니까요. <남산의 부장들>에는 황정민의 백사장과 신민아의 윤희수가 안나올 뿐입니다. 그리고 이병헌이 조금 더 나이를 먹었죠.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들이 무려 국정운영이라는 큰 일을 하면서도 그 안에서는 치열한 권력암투를 벌인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훨씬 더 사사롭게 나옵니다. 결국 이 영화는 남자들의 궁상스러운 집단 내 자리다툼을 인간적 본능으로 표현하면서도 그것이 아주 우아하고 커다란 것인것처럼 표현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최대 약점은 그 익숙한 서사구도입니다. 물론 모든 정치적 사건이 다 공적이고 비개인적일 수만은 없겠죠. 그러나 지나치게 개인화되는 이야기, 혹은 개인간의 드라마에만 천착하는 이야기는 한 인물의 공과 과를 모조리 "인간적인" 것으로 편집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삼류 건달이나 현실에는 있지 않은 정장 쫙 빼입은 인물들간의 이야기라면 그 책임이 조금 덜 할 수 있겠습니다만 박정희같은 공인에게는 보다 정확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모두의 책임이 더 큽니다.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성민이 연기하는 박정희는 상당히 찌질하고 좀스러운 인간이라서 그것만으로도 박정희 미화를 깨부수는 공은 있겠습니다만 오히려 이 영화의 이 시각이 드라마화된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굳이 박정희를 가지고 코리안 맥베스를 읽으면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근원적 한계를 탐구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든 악행과 한계가 "인간이어서" 발생하는 것처럼 영화가 특정 인물을 그리는 것은 부작용이 있습니다. <남산의 부장들>은 이 부분에서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영화가 꼭 같은 장르 내의 훌륭한 영화들을 본받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함정을 최대한 피해나간 다른 영화들을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겁니다. 한국영화에서는 윤종빈의 <범죄와의 전쟁>이 있을 것이고, 멀리는 스콜세지의 작품들이 있을 것이고. 심지어 고전적인 누아르 영화로서의 <대부>도 인간적인 지점 때문에 걸작으로 취급받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의 비인간성, 필연적인 자본주의화를 한 인간의 변화를 통해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영화의 누아르 세계관도 조금은 의아합니다. 제가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 정말 잘 찍었습니다. 때깔이 좋고 꽤 시네마틱합니다. 장르영화로서는 선배들의 훌륭함을 계승하려는 영화적 지점들이 있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건조함은 어딘지 멜빌의 <형사>나 <사무라이>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드는 의문은, 왜 한국영화들은 모든 세계를 정장입은 남자들이 총질하는 수직적 세계로 해석하려 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워낙 오래된 장르적 문법이니 어쩔 수 없고 우민호의 이 영화도 기존의 날건달스러운 영화들에 비하면 상당히 괜찮습니다만, 어떤 악과 폭력을 꼭 가해자들의 근사하고 경직된 세계를 통해 그려내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한국드라마의 검사 판타지처럼, 양복에 넥타이 차려입은 남자들이 선악을 초월하는 폭력을 휘두르는 걸 아름답게 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슈트 안의 힘과 로열티만이 뭔가 이 세계의 진리인것처럼 그려내는 게... 그 수직적 구조에 대한 판타지를 이제는 좀 깰 때도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국영화의 성찰은 늘 조직적 세계의 낭만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남산의 부장들>의 낭만은 2인자 김규평의 충심을 몰라주는 1인자 박정희의 어리석음에서 나옵니다. 따르는 사람의 충언과 충심을 잘 듣고, 지배하는 자는 조금만 더 이해심이 넓었더라면... 하는 그 비극 속에서 결국 완벽한 조직의 이데아는 그 자체로 어떤 판타지처럼 제시된다는 겁니다. 충성과 복종의 가치관이 깨지거나 지켜지는 세계는 이제 좀 그만 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세계의 필연적 질서라고 하더라도요. 제가 좋아하는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 같은 경우는 훨씬 더 사적이고 좀 비즈니스적이잖아요. 그런데 한국 누아르들은 늘 조직 자체에 대한 판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멜빌의 영화들도 사실 조직이나 서열에 대한 충성보다는 개인들의 건조한 가치관과 사무적인 성실함이 더 크게 충돌하지 않았나요. 왜 이렇게 한국영화들은 위/아래에 대한 그 관계도가 크게 작동하는 것인지... 때로는 그 수직성 자체가 어떤 가치관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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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에서 제가 특히 예쁘다고 느꼈던 씬들입니다. 주로 해외 씬들이 이뻤는데 국내 촬영분에서의 답답하고 누리끼리한 실내 촬영분들과 아주 대조적으로 칼라풀하고 개방적이면서 프레임 안의 프레임들이 많이 활용되어있는 장면들이에요. 해외에서는 항상 방 너머의 방이 있고 다른 데로 통하는 공간이 있는데, 한국은 언제나 폐쇄적인 느낌을 강조하는 장면으로 찍혀있습니다. 아마 당시의 정치상황과 인물들의 심리를 설명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어요.


배우들의 연기가 다 좋습니다. 뭐 원래 잘하는 배우들이 모이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 특히 다들 잘하더라구요. 제일 인상적이던 건 데보라 심을 연기한 김소진씨. 연기 정말 능청스럽게 잘합니다. <미성년> 때도 참 잘한다 싶었는데 이 영화에서 되게 잘해요. 주역 배우들의 존재감이 정말 대단한데 그 안에서도 유독 자기 캐릭터를 확 살리시더군요.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가 현실과 만날 때의 책임감이나 장르서사가 휘발시키는 어떤 현실감각이라든가. 그런 게 영화의 본질이면서 위험한 지점이기도 하잖아요. 부정할 수 없는 건, 영화가 잘 뽑혔다는 겁니다. 꽤 괜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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