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

2020.10.18 18:11

어디로갈까 조회 수:1056

카톨릭 신도가 아님에도 일 년에 한두 번 마음이 심산할 때 성당에 가 미사에 참례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이제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합시다"는 신부님의 말이 마음에 얹힐 때 열리는 환한 세상이 좋아서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람은 여일하게 조용히 불지만 그 속에는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무엇인가가 담겨 있기 마련이죠. 언제나 그것이면 족했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슬픔이 나으리이다.'

닷새 전, 고딩 때 저를 많이 예뻐해주셨던 은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고통의 끝판이라는 췌장암이었다고 해요. 고 1때 담임선생님이었고 국어 담당이셨어요. 단아하고 고운 모습에다 수녀원에서 유기서원까지 받은 후 환속한 분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신비로운 이미지가 더해져 교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을 듣던 첫 어버이 날, 우리에게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오라는 과제를 내셨더랬어요. '아, 싫어라~'라는 기분으로 괴발개발 써서 제출했는데, 다음날 종례 때 저를 콕 찝어 교무실로 부르시더군요. 그날 교무실에서 벌 서는 자세로 선생님에게 들었던 놀라운 한 말씀. "부모님에 대한 이토록 아찔하고 멋있는 글을 난생 처음 읽어봤단다." (그 말씀에 에?  갸우뚱~ 했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해요. - -)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누구나 선생님의 그 '한 말씀'과 같은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말씀 말이란 우리가 이정표 삼아 걷다가 지나쳐온  모든 순간들을 의미해요. 더 이상 말이 아닌 무엇이 될 때에야 완성되는 것, 그것이 한 말씀입니다. 그 말 너머에서 비로소 꽃은 피고, 사람들은 걷기 시작하며,  마주보는 얼굴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섬광이며 암흑인 한 말씀은 언젠가 제 안의 A가 닫고 나간 문이며 또 제 안의 B가 열고 들어왔던 문입니다. 되돌이킬 수 없이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들은 모두가 하나씩의 한 말씀인 것 아닐까요. 한 말씀 이후에도 여전히 '말'이 부족하다는 생각 또한 하나의 말씀일 것입니다.
많고도 다양한 한 말씀들을 모두 모아 하나의 얼굴로 보고자 할 때, 사람들은 불현듯 무릎을 꿇고 기쁨과 절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 말씀들로 가득찬 삶이란 결국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갈 시간들이지만, 그것은 애초에 얼마나 아름다운 긴장이며 또 얼마나 흔적없이 위대했던 것일까요.

덧: 선생님은 평생 비혼자로 사셨어요. 팔순 노모가 장례를 주관하셨는데, 아침에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 학창시절 네가 쓴 글들을 ##이가 다 보관해뒀으니 언제든 와서 가져가시게." 
여태 심장이 쿵쿵 내려앉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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