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과 오스카

2021.04.26 23:45

Sonny 조회 수:954

윤여정 배우의 수상을 먼저 축하해야겠지요. 한국인으로서 한국 배우가 이렇게 아카데미 수상을 하는 걸 보고 있으면 기쁨과 동시에 묘한 기분을 느낍니다. 깐느나 베를린에서 상을 받는 건 그래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 같은데, 미국인들의 "로컬" 축제에서 여우조연상 같은 상을 받는 걸 보면 아시아 변방의 국가가 도대체 어떤 성취를 이뤄냈는지 자국민으로서 좀 어안이 벙벙합니다. 저는 아직 <미나리>를 보지 못했고 뒤늦게라도 볼 생각입니다. 아마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것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급 연기구나!" 라는 쓸모없는 자부심에 휩쌓여 영화를 보게 되겠죠. 그럼에도 훌륭한 배우가 그의 연기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사건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앞으로도 그의 독창적이고 절묘한 연기들을 더 많은 영화에서 볼 수 있길 바랍니다.


윤여정 배우가 수상소감에서 자신의 첫 영화를 찍었던 김기영 감독을 언급했습니다. 윤여정이 자신의 연기를 펼쳤던 <미나리>는 김기영 감독과는 크게 상관이 없을 겁니다. 그것은 자신을 발굴해준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말 같은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저는 작년의 봉준호 수상과 윤여정 수상이 김기영이라는 키워드로 묶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 명은 하녀 당사자이고 또 한명은 하녀를 보고 자란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김기영의 영화 저택에 있는 계단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한국이라는 사회적 국적보다도 김기영이라는 영화적 영토 출신자들이 미국영화계에 발을 딛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불길하고 수상쩍은 세계의 생존자들이 충무라는 1층에서 2층의 미국영화계로 성큼성큼 올라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미국 영화인들은 다시 한번 바빠질지도 모릅니다. 아카데미에서 최초로 상을 받은 한국인들이 나란히 김기영이라는 감독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명동 씨네 라이브러리에서 김기영 감독 회고전을 했을 때 윤여정 배우가 GV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진행자는 당연히 김기영 감독에 관해서라면 가장 "오타쿠"라 할 수 있는 김홍준 감독이었구요. GV는 제가 여태 봤던 GV들 중 세손가락안에 꼽힐 정도로 웃겼습니다. 윤여정 배우가 김기영 감독의 이상무시한 영화세계에 대해 증인으로서 진지한 고찰을 보태줄 줄 알았는데 내내 흉만 봤기 때문입니다. 그날 gv에서 윤여정 배우가 한 말의 한 60%는 '감독님이 나를 너무 고생시켰다'였습니다. 이를테면 <화녀>의 클라이맥스 씬에서 남궁원이 윤여정의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계단에 쿵쿵 찧어가며 끌고 내려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너무 아팠고 나무라서 가시들이 박혀서 정말 고생스러웠다거나... 남궁원 배우는 현장에서 그 장면을 차마 못찍겠다고 해서 김기영 감독이 그 장면을 직접 찍었답니다. 이런 에피소드들이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쥐를 다 진짜로 가져왔다면서 치를 떠시더라구요. 윤여정 배우 특유의 말투를 생각해보시면 생생할 거에요. '내가 영화 찍으면서도 진짜 몇번을 도망갈까 생각을 하면서, 이 영화만 끝나면 내가 이 감독이랑 두번 다시 영화찍나 봐라 이랬어요. 그런데 영화 끝나고 나서 연락해서 자기랑 작품을 또 하재. 안한다고 하는데 출연료를 엄청 많이 준다는 거에요. 당시 신성일 선생님이 얼마 받았는데 나한테 얼마 준다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또 그 돈에 혹해서 찍은 거에요. 그럼 또 영화 찍으면서 내가 이 감독이랑은 두번 다시 안찍은다며 이를 갈어. 근데 또 하재. 내가 진짜 못살아~'


윤여정 배우는 김기영 감독의 <화녀>와 <충녀>에서 비련의 여자주인공 캐릭터를 맡았습니다. 그 당시 윤여정 배우는 상당히 인기있었던 티비 스타였다고 하는데, 오히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그만한 슈퍼스타로 누구를 비유해야할지 모르겠네요? 굳이 대자면 아이유 같은 느낌일까요? 마르고 소녀같은데 에너지를 품고 있는 그런 느낌을 당대 시청자들은 받지 않았을지. 김기영 영화에서도 딱 그런 역할을 연기합니다. 엄청난 신파를 품고 있는데 그 원념을 에너지로 터트리는 느낌입니다. 특히나 호스테스 캐릭터로 남의 남편을 빼앗으려는 <충녀>에서 윤여정 배우의 그런 느낌이 강합니다. 자본주의적으로 압도적 강자인 "안주인"과 기싸움을 벌이면서도 자기 남자를 뺏기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은 애처롭기도 하고 표독스럽기도 합니다. 이것은 특히 <하녀>의 이은심 배우와도 구분되는 지점인데 이은심이 영화 내내 귀기가 서려있다면 윤여정은 훨씬 더 약하고 인간적인 느낌입니다. 이것은 영화 전체적인 느낌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중심이 되는 배우가 만들어내는 차이이기도 하겠지요.


부조리한 세계에서 그 모순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캐릭터로 데뷔한 윤여정 배우가 이렇게 상을 받았다는 게 꽤 흥미롭기도 합니다. 이 배우는 애초에 여자배우들이 떠오르는 로맨스 스타로서 스타 등용문을 밟아나간 게 아니라 억울하고 뒤틀린 심상을 가진 캐릭터로 눈길을 끌었으니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윤여정 배우의 캐릭터들은 <돈의 맛>의 백금옥과 <죽여주는 여자>의 소영입니다. 한 명은 돈과 권력으로 그 부조리를 자신의 무기로 체화하는데 성공했고 다른 한 명은 돈과 권력이 없어서 구조 아래 깔리다시피 한 여자입니다. 그의 따뜻한 작품들이 따로 있음에도 제가 윤여정 배우를 이 캐릭터들로 생각하는 이유는 김기영의 영화가 그의 배우 커리어에 새겨놓은 그 출발점 때문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는 한국세계의 가장 강렬한 부조리를 온몸으로 증언하는 배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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