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유보했던 프로젝트를 더 이상 미루지 못할 시점이라 유럽 동료들과 이틀 간 화상 회의를 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비대면 업무가 정착되면서 겪는 가장 큰 난감함은 평범한 단어임에도 상대가  어필하려는 뜻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거에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언어 구사 능력이 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업무로 만날 때는 크게 두 유형으로 구분되는데요, '협상 능력이 있는 유연한' 언어구사와 ' 자신감 있고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단호형 어법이 있습니다. 
저는 언어가 모든 사람과 공평하게 일대일 대응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대화는 그림책 보면서 단어와 그림을 맞추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물론 그런 차원을 벗어나는 경우 또한 많습니다. 언어는 조금만 나아가면 추상적인 차원을 넘나들면서 그림이나 이미지로 환원되지 않고, 단어 자체의 의미도 문맥에 따라 수없이 달라지는 거니까요.  한국 초딩에게 국민 영어로 굳어진 'I'm fine, thank you'의 fine만 해도 의미가 다양하잖아요. 그 뜻들은 서로 상관 없기 마련이고요.

어릴 때, 떠돌며 사느라 이런저런 외국어를 배우는 동안 저는 그 수많은 뜻을 알기 위해 사전을 찾아서 뉘앙스를 감지하려 애쓰지 않았어요. 사전의 순서에 따라 나뉘는 의미들을 읽어내려간다고 상대의 문맥에 맞는 뜻을 인지할 수는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뉘앙스를 찾아내려는 노력은 중요하죠.  구글번역기가 그건 못하잖아요. 여러 가능성들 중 몇 개를 제시해 줄 수 있을 뿐이죠.  언젠가는 극복될 문제겠으나, 그 뉘앙스 차이에 목숨을 거는 상황의 사람들도 있는 만큼, 이 부분은 반드시 극복돼야 할 테죠.  따라서 저는 아직까지는 구글번역기에 대한 칭찬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 -

상대의 언어가 시원찮게 와닿으면 그의  생각도 시원찮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거니까요. '나'가 아무리 그 무엇에 대해 유용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더라도 그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면 그건 세상에 전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일부러 말하지 않는 경우는 제외고요.) 
반짝이는 아이디어라 해도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투명한 설득의 구조로 제시되지 않으면 외면받을 수밖에 없죠. 자신은 스스로의 생각에 반했겠지만 언어로 전달되지 않으면 세상에 그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혹시 그것이 세상에 나왔다 할지라도 공을 들여, 언어로든, 디자인 표현이로든, 음악으로든, 타인에게 이해 가능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겁니다.

시인 말라르메와 화가 드가가 싸웠던 일화가 생각나는군요. 드가가 "난 시로 쓸 아이디어가 많아" 말하자 말라르메가 이렇게 응대했다죠. "시는 아이디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쓰는 거야"
말라르메의 이 말은 우리 삶에서 언어가 가시적 형태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행위라는 걸 강변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언어에 관련된 행위는 언어의 사용 수준에 따라 가치가 평가되는 거니까요. 

사실 우리는 상대의 언어 구사 능력을 보며 상대방의 지적인 수준을 평가합니다.  언어란 그런 식으로 훈련된 결과이니까요.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꾸준히 훈련하지 못하면, 그 생각은 일정 수준에서 머물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상대가 말하는 방식을 통해 상태를 파악하는 부분이 크니까요. 언어에서 생각이란 말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표출될 뿐입니다. 방식이 나쁘면 생각도 나쁘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고 조야한 환원론이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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