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대한항공 '땅콩사건' 내부고발로 널리 알려진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는 애초 회사 이메일이 인증된 직장인들만 가입할 수 있는 익명 커뮤니티로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사용자수가 많지 않아 일부 대기업과 공기업 같은 규모가 큰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만 가입할 수 있었죠. 당시 가입 기준이 해당 커뮤니티를 개설할만큼 같은 회사에 다니는 인원수가 얼마나 되느냐였으니,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은 아예 가입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블라인드는 일부 '잘 나가는' 직장인들의 커뮤니티로 포지셔닝한 뒤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서비스로 성장한 셈입니다. 


1. 


한때 블라인드에서 유행했던 인증 문화중 하나는 바로 연봉 인증입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초봉이 세기로 유명한(?)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영혼까지 끌어모은' 연봉 인증을 하는 한편, 공기업 및 공공기관에 다니는 직장인들은 그에 못지 않은 연봉과 각종 복지혜택을 인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취업준비생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회사 잘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는 기준 중 하나가 '블라인드 회사 커뮤니티가 개설되어 있는 곳'일 정도였습니다. 당시 게시판에 올라오는 연봉 실수령액을 보면, 우스갯소리만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 


당시 고연봉 인증에 동참했던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대부분 그들이 해당 회사에 '시험'을 보고 입사한 것입니다. 이른바 '10대 대기업'에 속하는 계열사들은 모두 저마다 필기, 인적성, 실무 및 임원면접 같은 '시험'들을 거쳐 반기별로 신입사원을 채용합니다. 계열사 규모에 따라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 수천명까지 일련의 '시험'들을 거쳐 채용하는 셈입니다. 실제 현장에서 발생하는 인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또 해당 신입사원을 각종 교육 및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실무에 적합한 인재로 만드는데 평균 1년 가량 소요된다고 합니다.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하면,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신입사원 공채제도는 당장 필요한 인력을 채우기 위한 목적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 


그 '또 다른 목적'은 질 좋은 일자리를 공개채용이란 제도를 통해 청년 구직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해가 갈수록 청년세대의 취업난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가는 가운데, 반기별로 실시되는 대기업 공채는 질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마치 가정형편이 어려운 고학생이 사시에 합격한 뒤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과거의 사례들처럼, 대기업 공채를 통해 인생 역전까지는 아니지만 좀 더 평탄한 인생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얻을 수 있는 셈이었죠. (물론 수출, 제조업 기반 한국 산업구조에서 모든 직종, 직무의 숫자가 '공평하게' 분배되진 않습니다. 다만, 공채 제도는 적어도 그 '기회'를 제공하는 채널 중 하나였습니다)


4. 


하지만 현대자동차를 시작으로 이 같은 '공채'는 점점 사라질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실제로 고성장 시대가 저물어가는 지금, 과거 같은 현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규모 신입사원 채용의 수지타산이 점점 맞지 않기 때문이죠. 실제로 한국의 물가상승률을 제외한 실질 GDP는 과거 고성장 시대처럼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이지 않고, 대부분 신규 사업은 내수가 아닌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시작되고 또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한국 시장에 연연할 필요 없는 일부 대기업들은 신규 사업장만 해외에 확정이전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실무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신입사원 채용에 돈을 쓰느니, 차라리 검증된 경력직을 채용하는게 더 낫다는 계산이죠. 결국 더 이상 자국내에서 표준화된 산업 '일꾼'을 뽑고, 길러내는 공개채용 제도는 점점 줄어들거나, 과거의 유물처럼 사라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같은 공채는 전세계에서 한국을 포함한 일부 동아시아 국가에서 운영되는 독특한 인사제도의 전형이죠. 


5. 


일부 대기업들이 공채 규모를 줄이는 가운데 취업준비생 커뮤니티에서 볼멘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점차 좁아지는 것은 둘째치고, '대체 신입은 어디서 일할 수 있느냐'입니다. 유명한 모 짤방처럼 모두가 경력직을 원하면 취업준비생으로서는 이제 갓 사회에 첫 발을 내딜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실제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작은 회사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는 것보다 대기업, 공기업 공채처럼 '시험'을 통과해서 좋은 일자리를 따내는 것, 바로 그 같은 '시험' 성적을 잘 받는 능력을 갖추고, '시험'을 통해 경쟁하는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얼마 전 별정직 공무원으로 임명된 박성민 청년비서관더러 '시험(행정고시)'을 보지 않고 1급 비서관에 임명되는게 불공정하다라고 믿는 일부 여론처럼요. 공정한 기회는 꼭 그 같은 표준화된 '시험'만으로 보장될 수 있는 점이 아니란 현실을 감안하면, 이 같은 현상은 참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6. 


물론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 고시를 합격한 뒤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었던, 다시 말해 소수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 모든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게 설계된 사회 시스템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제도를 통해 고급 관리를 선발했던 역사적 배경을 떠올리면, 이 같은 현상도 그리 이해못할 것은 아니죠. 하지만 앞으로 사기업공채뿐만 아니라 시험성적을 통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많은 분야가 지금과는 꽤 달라질 것 같은데요. 더 이상 시험성적이 과거처럼 안정된 직장과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시대, 시험이 곧 공정한 기회 부여라고 여기는 착각은 언제쯤 사라질까요? 물론 시험 잘 보는 능력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시험을 준비하는 능력을 보장할 수 있는 환경은 저마다 다른 법이죠. 


이 같은 시험 능력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공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능력주의'가 공정하다 여기는 이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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