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11 16:46
0.
대한항공 '땅콩사건' 내부고발로 널리 알려진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는 애초 회사 이메일이 인증된 직장인들만 가입할 수 있는 익명 커뮤니티로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사용자수가 많지 않아 일부 대기업과 공기업 같은 규모가 큰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만 가입할 수 있었죠. 당시 가입 기준이 해당 커뮤니티를 개설할만큼 같은 회사에 다니는 인원수가 얼마나 되느냐였으니,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은 아예 가입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블라인드는 일부 '잘 나가는' 직장인들의 커뮤니티로 포지셔닝한 뒤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서비스로 성장한 셈입니다.
1.
한때 블라인드에서 유행했던 인증 문화중 하나는 바로 연봉 인증입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같은 초봉이 세기로 유명한(?)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영혼까지 끌어모은' 연봉 인증을 하는 한편, 공기업 및 공공기관에 다니는 직장인들은 그에 못지 않은 연봉과 각종 복지혜택을 인증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취업준비생들 사이에 우스갯소리로 회사 잘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는 기준 중 하나가 '블라인드 회사 커뮤니티가 개설되어 있는 곳'일 정도였습니다. 당시 게시판에 올라오는 연봉 실수령액을 보면, 우스갯소리만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
당시 고연봉 인증에 동참했던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대부분 그들이 해당 회사에 '시험'을 보고 입사한 것입니다. 이른바 '10대 대기업'에 속하는 계열사들은 모두 저마다 필기, 인적성, 실무 및 임원면접 같은 '시험'들을 거쳐 반기별로 신입사원을 채용합니다. 계열사 규모에 따라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 수천명까지 일련의 '시험'들을 거쳐 채용하는 셈입니다. 실제 현장에서 발생하는 인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또 해당 신입사원을 각종 교육 및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실무에 적합한 인재로 만드는데 평균 1년 가량 소요된다고 합니다.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하면,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신입사원 공채제도는 당장 필요한 인력을 채우기 위한 목적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
그 '또 다른 목적'은 질 좋은 일자리를 공개채용이란 제도를 통해 청년 구직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해가 갈수록 청년세대의 취업난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가는 가운데, 반기별로 실시되는 대기업 공채는 질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사회적으로 분배하는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마치 가정형편이 어려운 고학생이 사시에 합격한 뒤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바뀐 과거의 사례들처럼, 대기업 공채를 통해 인생 역전까지는 아니지만 좀 더 평탄한 인생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얻을 수 있는 셈이었죠. (물론 수출, 제조업 기반 한국 산업구조에서 모든 직종, 직무의 숫자가 '공평하게' 분배되진 않습니다. 다만, 공채 제도는 적어도 그 '기회'를 제공하는 채널 중 하나였습니다)
4.
하지만 현대자동차를 시작으로 이 같은 '공채'는 점점 사라질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실제로 고성장 시대가 저물어가는 지금, 과거 같은 현장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규모 신입사원 채용의 수지타산이 점점 맞지 않기 때문이죠. 실제로 한국의 물가상승률을 제외한 실질 GDP는 과거 고성장 시대처럼 드라마틱한 변화를 보이지 않고, 대부분 신규 사업은 내수가 아닌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시작되고 또 운영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한국 시장에 연연할 필요 없는 일부 대기업들은 신규 사업장만 해외에 확정이전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실무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신입사원 채용에 돈을 쓰느니, 차라리 검증된 경력직을 채용하는게 더 낫다는 계산이죠. 결국 더 이상 자국내에서 표준화된 산업 '일꾼'을 뽑고, 길러내는 공개채용 제도는 점점 줄어들거나, 과거의 유물처럼 사라지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같은 공채는 전세계에서 한국을 포함한 일부 동아시아 국가에서 운영되는 독특한 인사제도의 전형이죠.
5.
일부 대기업들이 공채 규모를 줄이는 가운데 취업준비생 커뮤니티에서 볼멘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좋은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점차 좁아지는 것은 둘째치고, '대체 신입은 어디서 일할 수 있느냐'입니다. 유명한 모 짤방처럼 모두가 경력직을 원하면 취업준비생으로서는 이제 갓 사회에 첫 발을 내딜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실제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작은 회사부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는 것보다 대기업, 공기업 공채처럼 '시험'을 통과해서 좋은 일자리를 따내는 것, 바로 그 같은 '시험' 성적을 잘 받는 능력을 갖추고, '시험'을 통해 경쟁하는게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얼마 전 별정직 공무원으로 임명된 박성민 청년비서관더러 '시험(행정고시)'을 보지 않고 1급 비서관에 임명되는게 불공정하다라고 믿는 일부 여론처럼요. 공정한 기회는 꼭 그 같은 표준화된 '시험'만으로 보장될 수 있는 점이 아니란 현실을 감안하면, 이 같은 현상은 참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6.
물론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 고시를 합격한 뒤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었던, 다시 말해 소수의 '시험'을 통과한 자들이 모든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게 설계된 사회 시스템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제도를 통해 고급 관리를 선발했던 역사적 배경을 떠올리면, 이 같은 현상도 그리 이해못할 것은 아니죠. 하지만 앞으로 사기업공채뿐만 아니라 시험성적을 통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많은 분야가 지금과는 꽤 달라질 것 같은데요. 더 이상 시험성적이 과거처럼 안정된 직장과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시대, 시험이 곧 공정한 기회 부여라고 여기는 착각은 언제쯤 사라질까요? 물론 시험 잘 보는 능력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시험을 준비하는 능력을 보장할 수 있는 환경은 저마다 다른 법이죠.
이 같은 시험 능력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공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능력주의'가 공정하다 여기는 이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2021.07.11 17:10
2021.07.11 17:26
사실상 재택근무가 보편화되고 재택근무에 발맞춰 인사평가제도가 대거 성과중심제로 바뀐다고 가정했을 때, 지금 같은 대규모 공채는 점점 더 사라질 것 같습니다. 1년차 신입사원 평균 퇴사율이 절반에 육박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고요.
2021.07.11 17:45
기업들이 종신고용을 사실상 포기하고, 노동자들도 평생직장이라는 걸 믿지 않는 상황이 온 이상, 나이가 어린 저렴한 인재를 미래를 보고 많이 뽑아서 우수한 인재를 만들어서 만드는 방식은 어떻게 봐도 말이 안되는 방식이 되는거겠지요.
기업입장에서는 키워서 만들어놓으면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게 당연하면 굳이 유지할 이유가 없고, 노동장입장에서도 많이 뽑은 인재중에 모두 우수한 자원가 되지 않는데 그럴경우 해고가 당연한 상황에서 어디든 현재의 좋은 대우를 찾아서 갈 수 밖에 없으니까요.
공채에서 시험이 메인이 되는 이유는 그게 "공정"해서가 아니라, 비용이 적게 들어가기 때문이지요.
많은 준비생들이 말하는 시험이 가장 공정하고, 그걸 통과한 자원만이 합당하다고 하는건 얼핏봐도 이상합니다.
어떤 기업들도 입밖으로 내지는 않겠지만, 같은 직무를 한다고 가정하면,
공채 신입을 뽑는것과 5년동안 실무에서 근무한 비정규직중에 누구를 채용할지 생각하면 적어도 현재에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효율적이고 어떤 의미로 (취준생들이 말하는)공정에도 부합합니다.
2021.07.11 17:57
결과적으로 정규직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었던 과거에 비하면 훨씬 부족한 상황이 되긴 하겠네요. 만약 비정규직 - 무기계약직의 정규직 전환을 전제로 채용한다면요.
2021.07.11 18:27
그들이 원하는 기회는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기업" 정규직이겠죠.
그리고 비정규직 뽑을때, 무기계약직 또는 정규직을 전제로 채용하는게 아니라, 기본적인 대기업채용방식이 말씀하신대로 경력직이 메인이 되는겁니다.
공채규모의 축소는 공채가 비효율적으로 변하는 상황에 기반한거지, 비정규직의 정규직, 무기계약직 전환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현재 벌어지는 의보공단이나 인천국제공항 문제는 실제로 불이익이 와서가 아니라, 정규직들이나 스스로를 예비정규직이라고 인식하는 준비생들이 정규직을 상위 카스트로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죠.
2021.07.11 18:44
전체 채용시장에서 대기업의 채용정책이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했을 때, 대기업의 공채 제도 또는 정규직 인원 축소가 꼭 해당 대기업 입사를 준비하는 취업준비생들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해당 대기업 계열보다 낮은 티어에 속하는 기업들 채용제도에 더 큰 변화가 생기겠죠. 실제로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고요.
아울러, 대기업이 기존 공채 제도를 통한 신입사원 채용 규모를 줄인다면 해당 인원 공백은 경력직뿐만 아니라 핵심 사업부문을 제외하고 비정규직 및 기타 도급 형태를 통해 외주화되는 형태로 서서히 진행되겠죠. 자사 신입사원을 채용하고 교육시키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경력직 교육 및 관리 비용도 적지 않게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과거 4년제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정규직 입사를 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은 점점 더 좁아지겠죠. 지금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세대들이 과거 세대더러 '꿀 빨았다'고 하는게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닙니다. 현재 채용시장만 놓고 보면 말이죠.
2021.07.11 19:22
공채제도의 축소는 결국 말씀하시는 "낮은 티어"의 기업에 입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과거에는 유망주를 100명 뽑아서 그중에 10명의 인재를 써먹겠다는 방침이었다면 이제는 그 10명을 밖에서 가져오겠다는 거죠.
정규직인원축소는 별개의 문제이고 여기서의 언급은 필요가 없구요.
그리고, 과거 세대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졸자채용이라는 것만 놓고 봤을때는 과거의 대학진학률이나 채용기준을 생각해야죠.
세대별로 꿀빨았다 어쩐다 볼멘소리를 하는건 징징거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2021.07.11 19:35
아뇨, 그 한 단계 아래 티어 기업의 정규직 인원 규모도 같이 줄어들거란 소립니다. 결국 공채의 종말은 기존 표준화된 노동의 필요성이 줄어든 산업 구조 변화의 반영인 셈이니까요. 이 같은 환경에서 전체 채용계획 및 규모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금 청년세대들을 무조건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아예 타당성 없는 이야길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주52시간 근무제도, 최저임금제도부터 시작해서 정규직 보호를 위한 근로기준법 내 각종 법들에 비판적이지만, 이에 반대하는 월급쟁이들더러 징징거린다는 소릴 하지않는 것처럼요.
2021.07.11 17:17
제가 2000년도에 대기업 여기저기 시험볼때 문제은행의 문제 중 하나가 '신입사원을 왜 뽑는가?' 였는데 말이죠.
모범답안이 뭐였는지 기억도 안나네요
친오빠가 회사를 그만두고 경력직으로 공사라든가 공무원하려고 시험을 많이 봤다했는데 연봉많이주는 소위 좋다는 공사(수자원공사, 한전)는 문제가 거의 아이큐 테스트 수준으로 어려웠다고 하더군요.
가난하면 어려운 문제를 풀거나 제대로 된 답을 얻을 기회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것 같은데
그렇게 본 시험의 결과로 신분상승하는 것이 과연 공평한가
모르겠네요. 뭐가 공평한지
결국 답은 복지일까요
2021.07.11 17:30
시험 잘 보는 능력을 '지능' 영역의 몫으로 본다면, 이것 역시 공정하진 않겠죠. 물론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저마다 다른 현실은 제외해도 그렇고요. 별개로 한국 사회에 비슷한 GDP 규모를 갖춘 다른 나라에 비해 '공정' '평등'에 대한 사회적 민감도가 더 높은 것 같긴 해요.
2021.07.11 18:20
이분 쭉 지켜보니
죽어가던 듀게에 억지로 활기를 찾게 하려고 불지르러 온거같다는 ㅋㅋ
2021.07.11 18:27
다른 분들과 다르게 듀게를 향한 제 숨겨진 충정을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07.12 08:54
언젠가부터 대학이 취업학원화 되기 시작했을때, 이미 공채의 종말이 예견되었지요.
공채는 종신고용이니 평생직장이니 따지기 전에... '우리 회사가 원하는 인재를 직접 키운다'가 전제가 되는 겁니다. 언젠가부터 그걸 대학에 떠넘기기 시작했죠. 기본적으로 가르쳐야 할거 다 학교에서 가르쳐서 보내라는...
이직이 잦은 업계는 거의 없다고 하는데, 아직 보수적인 제조업은 말만 안할뿐 은근히 '순혈'과 '혼혈'을 따집니다.
공채가 사라진다고 해도, 당분간은 피 따지는건 좀 더 갈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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