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듀게 산책

2021.11.07 08:33

어디로갈까 조회 수:801

하루 중 어느 시간대는 우리의 감정이 그려지는 캔버스와 같습니다. 마음을 찍는 사진관이죠. 그게 언제인지는 각자 다르겠고요.
저는 해뜨기 전이나 해질 무렵에 걷는 걸 좋아합니다. 그럴 때 하는 산책은 힘을 주지 않고, 크게 마음 기울이지 않고 쓰는 낙서와도 같아서 감정이 가는 대로, 자연이 이끄는 대로 스르륵 걸음을 떼어놓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산책이니, 소요니 하는 것들이 모두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흩어지는 걸음은 두 발의 리듬이 만드는 엇박으로 인해 항상 건강한 자태를 유지하는 것이고요. 사유 하나 없고 시선에 새로 잡히는 것 하나 없어도 마음이 차분하고 싱그럽습니다. 

산책하는 자는 거처가 없어서 걷는 게 아니라 돌아갈 곳이 있음에도 멀리까지 나갑니다. 신비롭죠. 걷는 자를 돌보는 배경은 이 우주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의 위엄이 있고, 그가 들어서는 공간에는 노을이 지다가, 어둑해지다가, 어느덧 달빛이 신성의 메아리 같은 여운을 남기니까요.
<하워즈 엔드>에서 어느 초낭만적인 은행원이 별을 따라 밤새 걸었다는 일화는 산책의 극치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루소나 칸트의 그것 역시 너른 울타리 너머로 훌쩍 나아가 보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산책은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변곡을 그을 수밖에 없습니다. 급격하지 않아도, 자신이 의식하지 않아도 변곡점을 찍어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산책의 위선이라고 들먹이는 견해도 있는데,  (근본주의 성향의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산책은 발의 생리적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기 때문에 지나친 비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책과 비슷하면서 현저히 다른 의미의 만보라는 것도 있죠. 만보는 도시의 거리를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걷는 것이며, 간판과 뭇 시선들, 거리의 공기, 무감각과 권태를 뚫고 동시에 흔들거리며 걷는 것입니다. 산책의 끝에서, 산책과는 단절을 이루면서 이루어지는 걸음이죠.
만보는 머리 속에 쓸데없는 고뇌가 비집고 든다는 점에서 현대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중요한 문제가 있고, 그걸 다음에 해도 좋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맘대로 되지 않을 때 만보하게 되더군요. 가끔 멋진 볼거리를 만나서 시선을 빼앗길 때에도 만보는 걷는 자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하지 않아도 좋을 짓을 한다는 잉여의 느낌 때문에 만보는 결국 우울에 당도하기 쉬워요. 그래도 상식의 범람 속에서 냉소적인 포즈를 취하는 것이 다시 하나의 상식이 되어버린 현대의 모드에서 만보도 중요합니다. 냉소에 대하여 우울도 할 말이 있는 것이니까요.

오늘 새벽 나가 걸어보니 가을걷이가 끝난 느낌이더군요. 서울은, 특히 아파트촌은 걷도록 난 길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현대에는 옳은 길은 없고 모든 길이 다 옳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걸을 수 있는 길이 더 이상은 줄어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듀게 또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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