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만종의 <소화시평>을 읽고 있습니다. 옛선비들의 서안에 반드시 놓여 있던 평론집이라죠.  오래 전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책인데 아직도 완독을 못하고 있어요. 하!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놨다 하는 서문이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라고 새삼 감탄하며 처음부터 다시 읽는 중입니다. (근데 왜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 걸까요 - -)

이 책을 읽으면서 조선 시대의 '표절' 사건에 대해 그가 부드러우면서도 가차없이 지적하는 점에 감탄했어요. 그의 시평은 조선 당시보다 지금의 가치판단이 현란하기 때문에 매우 담백하게 느껴지지만, 그 나름의 풍과 멋이 있습니다. 평론으로 치면, 대부분이 단평입니다. 그런 정도만으로도 조선시대 내내 이 책의 명성이 높았다는 것은 그 시대에 평론이 부재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흠

제가 이 시평론집을 읽으면서 친구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미리 하고 있는 중인데,  답글 기다리며 문득 서문 첫머리로 돌아갔다가 그 스케일과 시간성에 엄청 놀랐습니다. 김진표가 쓴 서문에는 홍만종이 이 평론집을 내려고 할 때 가졌던 두려움에 대해 언급돼 있어요. 누구나 책이든 뭐든 세상에 발표할 때의 두려움을 갖기마련이겠죠.  그에 대해 김진표가 답하는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길지만 두 사람의 문답을 인용해둡니다.

"옛날 양웅이란 사람이 <태현경>을 짓자 많은 선비들이 '니 주제를 모르고 성인인 척 경전을 짓다니! 춘추 시대에 오나라와 초나라에서 감히 왕을 참칭한 건방진 짓과 무엇이 다르랴.' 라고 비난하였습니다. 못난 제가 작가의 능력도 없으면서 이 책을 저술하였으니 왕의 호칭을 건방지게 사용했다는 그런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요?"

이렇게 홍만종이 김진표에게 묻습니다. .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위안의 답변을 기대하며 한껏 스스로를 낮춘 것이겠죠. 그런데 이에 응대하는 김진표의 언설이 참 마음에 들어요. 
"피할 수 없는 일이야. 보통 사람들은 옛날 앤틱을 좋아하고 지금의 좋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양웅은 한나라 사람이라서 한나라 유생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귀하게 여겼다네. 지금 자네도 '현재'를 살고 있네. 자네 글이 장독대나 덮어야 할 시시한 글이라는 세간의 비난을 피해갈 수 있겠는가? 어림없는 일이지."
김진표의 '장독이나 덮어야 할 시시한 글이라는 비난'을 요즘 유행어로 바꾸면, 냄비받침이나 짜장면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겠죠? -_- 아무튼 우리가 받는 모두 고통은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이란 것을 적시한 한말씀이에요.

시간의  착시 효과라는 게 있죠. 역사학자 개디스가 조망한 <현재주의>에 "앞으로 나아가는 차의 옆면에 백미러가 있어서 뒤의 풍경을 바라본다"라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과 뒤를 돌아보는 시간의 범벅은 어느 시대에나 매우 힘든 사항이라는 것. 무엇보다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 환담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도 그만인 인물로 묻히고 말았을 거라는 것. 세상에다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들이 가지는 복 중 가장 으뜸은 그의 재능만큼 그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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