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를 사면하면

2021.12.25 10:13

Sonny 조회 수:1016

누구에게나 생명력이 꽃을 피우고 무엇이든 이루고픈 열정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첫사랑에 불태우고 누구나는 창조적인 작업에 매진하고 또 누군가는 봄의 환희 속에서 낮잠으로 쓰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절대 이루지 못할 세상과의 화해에 소진합니다. 역사 속에서 언제나 존재해왔던 불의하고 비겁한 자들이 지나친 힘을 가지고 이미 뒤틀려있는 세계를 더욱 더 왜곡시킬 때, 그 열정은 억압자를 향한 증오로 들끓어오릅니다. 그 미련한 충동이 혁명이라는 로망으로 펼쳐지길 기대하고 또 무력하게 짓밟히거나 물거품으로 끝날 때도 어떤 미련한 인간들은 끝내 포기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세계를, 누군가가 물러나고 많은 것들이 새로워진 세계를. 보다 공정하고 평등한 세계에 대한 꿈은 그저 이데아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 실현된 것처럼 보이는 조각들만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죠. 정의가 미학으로 구현된 그 찰나의 반짝임에 스스로 망막을 자해하듯이요.


박근혜 퇴진은 대한민국의 소시민인 제가 가장 열정적으로 발을 담갔고 결국 성공해냈던 정치적 성취입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주말마다 열리는 촛불시위에 열심히 참가했었고 지각했던 딱 한번을 빼면 마지막까지 촛불시위에 참석했습니다. 그것은 여타 시위와 다르게 이미 수많은 시민들의 공분과 합의를 얻고 출발했었으며, 경찰들이 대단히 협조적이었고, 참가하는 시민들이 신경질적으로 비폭력을 추구했고, 언론과 다른 곳에서 계속해서 주목해주었습니다. 안전했고 쉬웠으며 아름답기까지 했던 시위였죠. 다칠 걱정도 사회적 얼룩을 남길 불안도 없이 그저 동네 운동회처럼 가서 촛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시민으로서 그렇게 행복했던 때가 또 있었을까요. 누군가는 머리가 깨져서 피투성이가 되던 시위를 저는 흥얼거리며 했습니다. 나중에는 게임을 하듯 아이템을 착용해서 시위에 나가곤 했습니다. 미니 확성기도 사고, 횃불도 사고...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파면을 외치던 순간은 제 인생에서 가장 뭉클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쉽고 즐겁게 했다고 촛불시위의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기분은 잠깐이나마 고도로 민주화된 시스템이 자율화되어 돌아갔던 덕에 느끼는 풍요로움이었지만 그렇다고 촛불시위가 생각없이 놀기만 하던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곳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지독하게 상실감을 느끼던 세월호 유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감사하다고 외칠 때 저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송구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죠. 여러 노조들이 있었고 박근혜 치하에서 지독하게 시달리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생각나지도 않지만 그들이 시달리거나 잃어버린 것들을 전해들으며 정말 치를 떨었습니다. 박근혜는 저 자리에 계속 머무르게 해서는 절대 안되는 인간이라고. 어쩐지 흥겨운 기억만 남아있는 지금에도 그 시위의 본질이 울분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들 너무 화가 나고 지긋지긋해서 박근혜랑 싸우러 나왔던 것이었죠.


박근혜는 제 인생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제가 가장 격하게 미워하고 대적했던 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저를 죽을 때까지 모르겠지만 그가 모르는 저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간대의 분노를 그에게 쏟아부으며 추운 거리를 걸었습니다. 한 때 저는 반농반진으로 제가 세상에서 가장 이름을 많이 부른 여자는 박근혜라고 하고 다녔으니까요. 제가 시위를 처음 나갔던 목표도 박근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해보는 것이었고 제가 시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대를 감옥에 처넣을 수 있던 것도 박근혜였습니다. 그 미움의 불씨는 거의 잔불만 남아있지만, 그래도 가끔은 타오르곤 합니다. 길게는 그의 아버지까지 거슬러올라가야겠지만 저에게는 그가 한국정치사의 원흉인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제가 이렇게 제 촛불시위를 장황하게 쓰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무슨 정치평론가인양, 대단히 객관적인 제 3자의 포지션으로 이죽거리면서 이 사건에 반응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작은 책임을 다하고 기대를 품었던 시민으로서 문재인에게 분명하게 묻고 싶었습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시민으로서 문재인의 사면 선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가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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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문재인 대통령의 박근혜 사면은 제게 대단히 황당하고 치욕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저에게 이 사건은 문재인이라는 정치인 한명의 잘못된 선택으로만 다가온 게 아니라, 촛불시위 현장을 거닐었던 저와 수많은 시민들의 열망을 깨버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거의 3개월동안, 한주도 거르지 않으면서 저를 포함한 수많은 시민들이 "박근혜를 감옥으로!"라고 외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문재인이 대통령 임기를 채울 때까지만 딱 가둬놨다가 풀어주기 위해서? 그 누구도 그런 시한부 징벌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박근혜의 죗값을 당연히 법원이 정한대로 다 치르게 하게 위함이었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직 위에 있는 그를 법의 영역으로 손수 끌어내려 법이 만인에게 적용되고 죄는 민주사회의 규칙대로 계산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촛불시위 이후의 대한민국은 많은 것이 허물어진 가운데 박근혜를 가둬놓은 사면의 쇠창살을 기둥삼아 다시 재건되고 있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박근혜를 사면한 것은 다시 한번 권력말고는 그 어떤 법칙도 없는 혼란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촛불시위 초창기부터 저는 문재인과 더민주를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더민주 지지자들은 기억이 안나는 척 할테지만, 문재인과 더민주는 촛불시위에서 발을 빼며 오히려 내각을 더민주 위주로 재편하자는 정치적 계획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으니까요. 그리고 촛불시위가 점점 대세가 되어가니까 슬그머니 참여하더니 대선에서는 문재인을 갑자기 촛불대통령으로 띄워주더군요. 정말 황당했습니다. 가장 앞장설줄 알았지만 가장 꾸물거리며 다른 꿍꿍이를 펼치던 정치적 집단이, 후에는 촛불을 주도한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에 질렸습니다. 촛불이 세운 정권이니 어쩌니. 촛불시위에서는 한번도 누구를 대통령으로 세우라며 대선운동이나 특정정당 지지행위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공을 본인들이 쏙 빼가놓고는, 이제와서는 뭐가 어떻다고요? 박근혜를 사면한다고 했을 때 이낙연이 어떻게 지지율을 말아먹었습니까? 그런데 동일한 행위를 현직 대통령이 저질렀습니다. 그게 촛불정신인가요? 적폐청산인가요? 적폐소환에 훨씬 더 가까운, 본인이 적폐가 되어가는 일입니다. 촛불정신을 계승한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에 촛불의 가장 간절한 바람이었던 박근혜 구속과 법적처벌을 스스로 무효화시키는 게 가당키나 한가요? (물론 더민주 광신도들은 이것 또한 정치적 노림수라면서 본인들만의 망상회로를 돌리고 있습니다. 진짜 지겹고 짜증나는 인간들입니다)


오죽하면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이대로는 더민주의 대선후보가 윤석열을 이길 건덕지가 확실히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본인이 정치적 악수를 자처해서 보수지지자들에게는 이른 승리감을 안겨주고 더민주 지지자들에게는 위기감을 안겨주면서 이재명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같은 것을 하는 게 아닌가 하고요. 이재명 또한 문재인의 선택을 치하하더군요. 비서실장이나 다른 이들과는 어떤 협의도 없었다 하고요. 이제 저는 문재인의 박근혜 사면을 이해할 그 어떤 힘도 재료도 없습니다. 박근혜를 감옥으로 보내기 위해 백만 단위의 국민들이 광장에 모여 통합을 이뤄냈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은 이제 박근혜를 사면하는 것이 국민대통합이라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나요? 당연히 극성 지지자들의 해석도 읽어봤지만 그들 역시도 뚜렷한 대답은 내놓지 못하던데요. 어떻게 해도 극우보수들만이 의기양양해할 선택을 무슨 예봉을 꺾었다 어쨌다하는 그런 해석말고, 지금 당장 촛불시위의 참여자 시민들이 박근혜 구속으로 이뤄낸 정의를 상실한 것에 대한 의미는 전혀 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문재인 정부는 늘 소수자 국민을 외면하는 정치를 해왔습니다. 김용균 어머니가 소매를 걷어부치고 외치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5인 이하 사업장 처벌 조항 삭제부터, 아직까지 미루고 있는 차별금지법의 성소수자 조항 포함, 그리고 본인들은 수백명이 모여서 선거 유세를 하면서도 민주노총의 시위는 위법이라며 철저하게 탄압하는 모습들까지... 가장 결정적으로 이들은 세월호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임한 적이 없습니다. 국회에서 그렇게 필리버스터를 하던 테러방지법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이들이 야당시절 그렇게 소리높이던 사안들은 여당이 되어서는 뭐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터졌던 굵직굵직한 인상들의 성폭력 사건과 그에 대한 지독한 2차 가해 및 우리편 감싸기... 이번 박근혜 사면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박근혜는 군부대를 동원해 시민 상대로 진압할 계획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2238.html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정말 천진난만하게 시위를 나갔던 셈인데, 시위라는 게 이렇게나 부담이 크고 두려운 것일줄은 뒤늦게 알았죠. 그리고 문재인은 정말 피를 볼 수도 있었던 시민들의 노력을 일거에 무효화시키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에게 국민은 도대체 누구이며, 대통합이란 무엇일까요. 왜 가장 위태로운 사람들의 필사적인 항거는 계속해서 무시하는 걸까요.


백만 단위의 시민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 규모가 점점 줄어들었어도 몇만 단위의 시위가 몇개월간 지속되는 것 또한 흔한 일이 아니구요. 문재인은 계속해서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나중으로 미뤄오다가, 이제는 저 확연하고 분명한 목소리마저 무시하는 정치적 판단을 했습니다. 그 동안 계속해서 박근혜를 사면시켜주고 싶었다가, 아무 것도 책임질 필요없는 임기말이 되니까 이때다 싶어 사면을 한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저는 이제 문재인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어지지 않아졌습니다. 그의 비겁함과 기회주의는 일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지지자들도 이 선택을 감히 변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박근혜 사면을 선택한 이 순간은 얼마전 전두환이 사과없이 죽어버리고 나서 더민주 지지자들의 구호처럼 "적폐청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함부로 한 사면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가치관을 얼마나 훼손시키는지 뼈저리게 느낀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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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까지만 해도 문재인의 퇴임 후를 생각해보곤 했습니다. 그는 비겁한 정치인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정도의 초인을 늘 기대할 수는 없었으며, 그의 정치적 선택을 비난하되 그의 인간성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요. 그가 보수진영과의 파워게임에 밀려 감옥에 가는 건 너무 혹독한 응보같았고 그래도 그의 말년이 그의 반려동물들과 소소하게 행복을 누리는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랬죠. 


제 유치하고 안일한 소망을 철저히 깨부숴진 문재인을 있는 힘껏 경멸합니다. 제가 박근혜의 추후 행복을 빌 수 없는 것처럼, 문재인의 안녕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그가 진 정치적 과오를 뒤집어쓰고 살아야하는 수많은 다른 시민들의 분노에 몸서리치면서 살길 바랍니다. 저는 벌써 그의 어떤 불행에도 초연해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함부로 용서한 대가로 수많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한 삶을 살리라는 각오쯤은 분명히 해뒀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정말로 처참하고 비통한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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