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31 23:18
우리가 세종 때 나인인 소쌍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건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린 순빈 봉씨의 레즈비언 스캔들 때문이지요.
조선시대와 레즈비언 스캔들이라니 영 맞지 않는 거 같은데, 사람들은 특별히 바뀐 게 없고, 이전엔 잘 안 보였던 관계와
사람들이 지금 잘 보인다면 그건 옛날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당시엔 그런 게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순빈 봉씨의 스캔들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없는 척, 보이지 않은 척 했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창입니다. 물론 그 이미지는 편집되고 왜곡되어 있으며 수상쩍지요. 순빈 봉씨는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고 당시 사대부들의
사고영역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 때문에 그렇게 아름답거나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이 이야기가 계속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에도 순빈봉씨와 소쌍의 이야기는 여기저기에서 짧게 극화되었지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일화를 빼면 무시할
수 없는 큰 구멍이 생깁니다) 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상물은 이번 KBS 드라마 스페셜 에피소드로 방영된
[그녀들]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상파 프로그램이라 사람들이 기대를 하면서도 걱정이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의외로 잘 뽑힌 것 같아요. 앞에 놓인 '지상파 방송' 핸디캡도 이 정도면 잘 해결했고.
드라마는 우리가 실록을 통해 알고 있는 소쌍의 자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가 소쌍이 말려든 음모를
보여주죠. 궁중에서 군관과 밀애 중이었던 게 들통난 소쌍은 세자의 후궁 승휘의 스파이가 되어 막 임신했다는
세자빈의 처소로 들어갑니다. 어떻게든 세자빈의 아기를 낙태시킨다는 게 임무죠. 하지만 둘의 관계는 소쌍이
예측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 드라마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태반이 검열의 논리입니다. 드라마는 소쌍과 봉씨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하면서 이들을
진짜 동성애 관계로 그릴 수 없습니다. 시청자들이 걱정했던 이유도 이것이지요. 대신 [그녀들]은 억압적인 가부장적
유교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유로운 영혼인 세자빈과 소쌍의 '우정'을 그립니다. 여기서 우정 앞뒤에 작은 따옴표를
찍은 건 이 사람들도 이게 그냥 우정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앞에 잠시 나왔던 소쌍의
남자친구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검열을 쳐서 핑계를 만들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하는 내용이었던 겁니다. 그 이야기는 소망성취적인 해피엔딩이고 그 과정은 박찬욱의
[아가씨]와 여러모로 비슷합니다. [핑거스미스]의 팬픽의 팬픽이라고 할까요. 실제로 이 드라마는 은근히
팬픽이나 웹소설의 익숙한 감수성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보통 남주가 하던 대사를 세자빈이 하고
있을 뿐이죠.
조금 더 길었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결과가 정말로 안 좋았던 [F20] 대신 이 드라마가 '시네마'의
대접을 받았다면 어땠을까도 싶고. 소쌍 역의 김새론과 세자빈 역의 정다은이 보여준 화학반응이
정말로 좋아서 그런 생각이 더 들기도 하고. 하지만 이야기의 [아가씨]스러움이 이를 막았는지도
모르죠.
(21/12/31)
기타등등
원고를 쓰는 중이었는데, 김새론이 드라마 스페셜 TV 시네마 상이라는 걸 탔네요.
연출:
이웅휘, 각본: 강한,
배우:
김새론, 정다은, 서은영,
다른 제목: The Palace
Hancinema https://www.hancinema.net/korean_drama_Drama_Special_2021_-_The_Palace.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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