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없는 남자'를 봤어요.

2022.02.13 22:43

thoma 조회 수:531

(20년 전 영화지만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The Man Without a Past, Mies vailla menneisyyttä, 2002

126D7F1B4B67C89C2A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성냥 공장 소녀'가 인상적이라 왓챠에 있는 이 영화도 봤습니다.

주인공은 여행지인 헬싱키에서 강도에게 머리를 맞고 기억을 잃습니다. 돈과 소지품을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된 이 남자가 빈민가에서 구조되어 새 인생을 살게 된다는 얘기예요. 

기억을 상실해서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게 된다는 설정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이야기 거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영화나 tv드라마들에서 이리저리 활용했고요. 기억을 잃은 후의 상황과 기억이 돌아오거나 원래 주변인들이 자신을 찾아내거나 해서 기억 상실 이전의 상황이 충돌하며 갈등하는 내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쪽 사람들을 선택해야 하나, 나의 진정한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요. 이 영화는 깔끔합니다. 일단 주인공이 기억을 되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원래 가족을 찾게는 되지만 파탄 직전의 상황에서 새로운 거처를 찾아 떠난 차에 사고가 생겼었고 자신이 사라진 이후 완전히 정리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정체성의 혼란 문제나 두 삶을 두고 선택의 갈등을 하는 문제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일종의 실험을 진행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런 배경도 기억도 없이 홀로 다시 산다면?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회적 역할과 대부분은 타의에 의해 조성된 욕망과 자신에 대한 습관화된 좌절감으로 이루어진, 나 자신이라 생각하며 진저리냈지만 아니었을 수도 있는 이런 것들에서 놓여나서 살아본다면? 

영화는 주인공이 자고 먹고 입는 것을 마련하게 되는 과정에서 빈민가와 주변 사람들의 단순하고 별 생각없이 행해지는 선의와 도움을 보여 줍니다. 없이 살면서 생판 타인에게 돈을 쓰다니 그러니 가난을 못 벗어나지,라고 경제 관념 철저한 중산층이라면 혀를 찰지도 모를 일이지만요. 이웃과 함께 구세군에 가서 특식도 먹고 옷도 얻어 입고 버려 놓은 것들 이것저것 주워 모아 컨테이너 거처를 꾸미고...일과 연인까지 생기네요.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이 얼마나 적어도 되는지 보여 주고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게 재지 않으면 얼마나 쉽게 가능한지도 보여 줍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해딩한 사람이지만 단순한 삶은 충족이 가능하다는 걸요. 

'성냥 공장 소녀'가 전달 방식이 특이했었는데 이 감독의 기본적인 성향이었던 모양입니다. 큰 동작, 다채로운 표정 연기, 풍부한 억양 -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극적이고 호들갑스러운 것들을 배제하는 전개, 아무도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연기를 합니다. '성냥-'은 암담한 분위기였지만 이 영화는 유머러스한 면이 있고요. 어떤 장면은 마치 학예회의 무대에 오른 아마추어들의 연기 같아요. 감정을 살리는 것이 너무나 쑥스러운 듯한 연기말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는 학예회의 무대에서 공연되는 옛날 이야기나 동화의 성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량한 극빈자들끼리 돕고 정서적인 나눔을 하는 꿈과 같은 이야기니까요. 몇 개 안 되는 감자를 수확해서 연인과 먹을 것과 내년 씨감자를 제하고 하나를 다시 반으로 나누어 이웃에게 주는 장면에서 확실히 그것을 느끼게 하네요. 은행과 관공서의 지배하에 있는 착취적이고 경직된 삶과는 다른 형태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우화적인 실험이라 봐도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꼭 기억 상실이라는, 머리를 몽둥이로 연타로 두둘겨 맞는 충격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아도 조금쯤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과거에 쫓기지 않으며 현재를 미래의 담보로 삼지도 말고 오직 현재에 살자고 매일 다짐한다면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1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2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935
119067 7人7色 '무한도전' 멤버들의 '명화 패러디' 화보 눈길 [16] 1q83 2010.06.15 4866
119066 나이가 들수록 예민해지는것은 보편적 현상인가요 [14] 까스명수 2014.02.03 4865
119065 오후 네시경 KTX 서대전역에 내리신 아름다운 처자분을 찾습니다 ㅠㅠ [16] 가나다라 2013.07.29 4865
119064 윌리엄 깁슨 검색어 1위! [21] 헐렁 2012.09.19 4865
119063 탕웨이의 결혼 소감, 김태용&탕웨이 커플의 스웨덴 결혼식 [9] 보들이 2014.07.25 4864
119062 아버지는 개다 [23] 감자쥬스 2012.04.23 4864
119061 [과학기사] 경락이 과학적으로 존재한다고 밝혀진 모양이네요..-_-;;; [24] being 2011.10.10 4864
119060 디시인사이드 이민우 갤러리 [4] 닥터슬럼프 2011.09.30 4864
119059 개그맨들의 위계질서 [10] 메피스토 2012.10.03 4864
119058 조석씨 사건에서 제일 걸리는 부분... [19] 도야지 2011.08.03 4864
119057 강서면옥, 점심특선 = 불고기덮밥 + 냉면 소짜 콤보 [7] 01410 2010.06.24 4864
119056 마지막에 밥 볶아먹기 [20] 꽃개구리 2010.06.22 4864
119055 밀회 7 - 조선족 아주마이 포스 작렬 씬 [9] 어디로갈까 2014.04.08 4863
119054 나꼼수 김용민 깝치다가 결국... [4] 흐흐흐 2013.08.26 4863
119053 [바낭] 듀게 무서움 [15] 데메킨 2012.12.08 4863
119052 서양의 흔한 셀카 [12] Shearer 2011.11.22 4863
119051 (바낭인)여자에게도 정복욕(?)이런게 있나요? [15] 새벽하늘 2011.11.21 4863
119050 피에타 보고 가는 도올.jpg [2] 무비스타 2012.09.11 4863
119049 모 자동차 동호회에서 재능기부하고 욕 먹은 사건 [4] 닌스트롬 2014.02.16 4862
119048 머지 않은 미래에 스스로 삶을 마감할 것 같습니다. [19] nomppi 2013.10.07 486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