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카우' 좋았어요.

2022.04.02 13:19

thoma 조회 수:547

First Cow, 2019

809899a097e0065076ebbb2f38def39257f1c691

웨이브를 탈퇴하려니 한 번 더 생각하라며 돈(10000 코인)을 주길래 그걸 이용해 봤습니다. 덕분에 보게 되어 고맙네요, 웨이브. 영화 소개에 나오는 내용 이상의 사건이랄 게 없어서 제 생각엔 스포일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작이며 상영 시간은 두 시간 정도입니다.

영화가 호평이라 관심을 둔 상태에서 아래 두 사람 사진을 보면서 궁금했습니다. 1820년대 서부를 배경으로 동양인 한 명과 사람 좋아 보이는 서양인 한 명이 어떤 이야길 펼칠지? 총싸움은 당연 안 나올 것 같고, 숲 속에서 빵구워 파는 소박한 얘긴가? 영화가 끝났을 때 내용은 앞서 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왜인지 저는 눈물이 조금.... 제가 이 영화에 대해 무슨 미문을 끄적이려 노력한들 영화 자체의 마음에 스며드는 듯한 아름다움과 신비로울 정도의 영향을 잘 표현 못 할 것이고, 역사나 자본의 흐름 속의 개인에 대해 소화한 좋은 추천 글을 쓰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늘 그렇듯 어떤 점이 저에게 특별히 다가왔는지만 조금 생각해 봅니다. 

각자의 곡절에 쫒기다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인생길 중 짧은 여정을 동행하게 됩니다. 중국 출신으로 여기저기 많이 떠돌아 생존 능력 있고 두뇌 회전이 빠른 킹루와 쿠키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섬세한 제빵사 피고위츠. 이 두 사람의 만남, 이별, 재회, 또 다른 이별, 다시 한 번의 재회로 이루어진 이야기입니다. 이 둘이 남녀가 아니라 이야기에 불필요한 긴장이 없어요.(영화 속 시간에선 그렇습니다. 함께하는 시간이 더 길었다면 다른 전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쿠키가 갖는 동식물에 대한 다정함, 몸에 붙은 자연스러운 가사노동이나 아름다운 것 알아보는 평화로운 언행은 그가 남성이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관점의 여성성을 지녔으며 이것이 생물학적 성별과 무관하게 인간의 고귀한 품성임을 생각하게 합니다. 투쟁, 쟁취, 정복 같은 힘의 가치가 많은 서부 영화에서 두드러진 것과 아주 다르죠. 저는 쿠키의 일견 수동적으로 보이는 이런 품성이 영화의 결말(프롤로그와 연결되는)과 연결되면서 영화 '렛미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쿠키가 구운 과자를 성황리에 팔게 됩니다. 진흙 길바닥에서 조심스럽게 시작된 장사는 거기 모인 온갖 근본 없는 떠돌이, 한탕 주의자들, 노동자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 고소하고 향긋한 힘을 지녔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든 통하는 맛있는 디저트의 힘입니다. 약간의 우유만 있다면 누구든 누릴 수 있는 맛입니다. '약간의 우유' 이게 문제입니다. 우유는 누구의 소유인가. 소는 누구의 소유인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긴 여행을 견뎌 도착한 한 마리의 소는 얼마만한 가치를 지녔는가. 신대륙이 기회와 가능성의 땅이라고 킹루는 믿고 있지만 여기도 자본의 차이는 인간 조건의 차이로, 자본을 소유한 이들만 향수에 젖거나 고상한 맛조차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장치들이 이미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 장치가 굴러가는 과정에 많은 이들이 깔려 사라졌을 것입니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그들을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고요. 그게 전면에 나서서 두드러졌다면 별로였을 겁니다. 숲을 배경으로 살아 움직이던 점잖으며 다감한 작은 인물로 작은 사건 하나를 갖고 마음에 진동을 일으켰기에, 그래서 되씹게 되면서 저처럼 자본이나 역사 속 강자들 이야기에 가리운 약자들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쿠키라는 인물이 갖는 태도, 부드러움이나 조심성 같은 태도가 특별한 인상으로 마음에 남네요. 배경이 오리건주라는데 영화 속에서 여긴 너무 춥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많은 서부 영화의 땡볕과 마른 땅과 먼지 대신 숲, 강, 진흙, 서식하는 동식물들이 비춰지고 사냥꾼들은 털옷을 입고 다닙니다. 오리건 주를 찾아보니 캘리포니아 위, 워싱턴주 아래입니다. 두 중심 인물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호텔과 베이커리를 여는 꿈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기회가 되면 보시길 추천합니다. 


23cf4d67a939eaf1e5ae213f1c3798eb3a921eb1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04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6638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6774
119697 [EBS1 스페이스 공감] 잼세션II 관악기2 [EBS1 다큐시네마] 길모퉁이가게 [3] underground 2022.04.30 235
119696 [넷플릭스바낭] '매버릭'을 기다리다 지쳐 '탑건'을 다시 봤지요 [17] 로이배티 2022.04.29 774
119695 이 영화 아시는 분 계실지 [7] 정해 2022.04.29 495
119694 영화와 관련없는 잡담 [5] daviddain 2022.04.29 268
119693 한국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점 [25] catgotmy 2022.04.29 772
119692 '레벤느망' 왓챠에서 봤습니다. [4] thoma 2022.04.29 355
119691 개신교 개교회주의에 대해 [5] catgotmy 2022.04.29 359
119690 저의 성적조작 이야기- 저는 정계에 진출할수있을까요 [7] 채찬 2022.04.29 736
119689 베터 콜 사울 [6] theforce 2022.04.29 551
119688 (부산 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 - 차별 금지 법안 반대 서명운동 catgotmy 2022.04.29 237
119687 [레알넷플릭스바낭] 올해의 넷플릭스 라인업을 대략 찾아봤습니다 [12] 로이배티 2022.04.28 709
119686 축구 ㅡ 라이올라 사망 아니래요 그 외 잡담 [3] daviddain 2022.04.28 365
119685 야외 마스크 해제와 관련되어 걱정이 큰 분들도 많을거 같군요. [8] soboo 2022.04.28 835
119684 바낭- 어쩌면 내가 하고싶은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진실 [2] 예상수 2022.04.28 259
119683 (아마도)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글. [13] 젊익슬 2022.04.28 890
119682 The most beautiful part is, I wasn’t even looking when I found you. [2] 가끔영화 2022.04.28 231
119681 [넷플릭스바낭] 이십여년만의 '원초적 본능' 재감상 잡담 [40] 로이배티 2022.04.28 951
119680 숟가락 얹기 정권 [6] soboo 2022.04.28 656
119679 동네 정치의 빛과 어둠, 그속의 나 [3] 칼리토 2022.04.28 389
119678 극우주의를 경계하다(feat.프랑스) [5] 예상수 2022.04.28 42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