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자다 깨서 할 것도 없고 온라인으로 만화책을 읽었습니다. 별 볼 일 없는 야쿠자 만화였는데, 계속 읽게 되더군요. 사채꾼 우시지마에서 (일본) 뒷세계의 비열함과 폭력성을 이미 끝의 끝까지 봤다고 느꼈기 때문에 저는 야쿠자가 주인공인 작품들을 코메디이든 액션이든 드라마든 별로 좋아하질 않습니다. 이 만화도 그렇게 새로운 건 없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일종의 마동석 류 활극이고 야쿠자들이 계속해서 싸움을 합니다. 좀 코메디로 갈라치면 이야기가 금새 지독해지면서 야쿠자들의 끔찍한 폭력을 현실적으로 묘사해서 야쿠자란 직종이 얼마나 시시하면서 위험한지를 알린다는 점에서는 교훈이 있다고 할까요.. 작은 돈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고, 시체를 묻고, 그렇게 번 돈을 무의미하게 탕진하고, 돈 벌 수단이 딱히 없어서 계속 갈취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고...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넷플릭스에서 신나게 하고 있죠. 큰 감흥은 없었습니다. 야쿠자간의 항쟁이 한국의 조폭 싸움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 사람들을 죽여버리는 감은 있었지만요. 코믹한 일상이 순식간에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살인마 이야기로 바뀌는 것은 좀 섬뜩하긴 했습니다.


마동석 류 코메디라고는 했지만 주인공은 더럽게 매력이 없습니다. 그래도 마동석은 우리 편은 지켜주고 최소한의 도리는 하는 경찰로 나오니까요. 폭력의 명분이 확실하게 있고 가학적인 유머를 잘 터트립니다. 그런데 이 만화의 주인공은 인간적으로 그냥 실격입니다. 나이는 이미 장년을 향해가는데 아무 일도 안해서 동네에서 젊은 양아치들 삥이나 뜯고, 툭하면 사람들한테 시비를 걸고, 자신의 육체적 힘에 자부심을 과하게 느껴서 늘 독불장군처럼 나댑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이 나와서 왜 날 버렸느냐고 울분을 터트리는데도 싸움으로 이겨놓고는 자긴 원래 그런 인간이라면서 꺼지라고 하죠. 이런 캐릭터들은 대개 반전으로 고양이를 좋아한다거나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작품에서 그런 건 일절 없습니다. 이야기가 재미없어도 인물에 흥미를 느끼면 그의 미래가 궁금해서 다음편을 계속 보게되는데 이 작품은 인물에 도저히 몰입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가 50이 넘어가는데 주구장창 힘자랑만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심한 말만 내뱉는 인물이 무슨 매력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작품을 계속 보게 되더군요. 잠이 안와서 그냥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이 무매력 인간들의 항쟁이 어떻게 끝날지 계속해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야기의 힘을 느꼈습니다. 분위기가 좋은 것도 아니고, 새로운 소재도 아니고, 인물들은 유치하고 단세포인 마초들에다가, 살인과 협박과 인체 훼손이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도 주인공 측과 싸우는 상대방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이며 이 사건들이 어떻게 종지부를 찍을지 궁금해서 계속 봤습니다. 왜냐하면 사건들이 차근차근 이어지고 인물들의 힘의 정도가 차근차근 빠지면서 단계를 밟아나가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이야기란 꼭 캐릭터도 아니고 인과응보(도덕적 주제라면 주인공부터 허무하게 죽어야 이치에 맞습니다 ㅋ)도 아니고 원펀맨처럼 스펙터클한 연출도 아니고 스포츠물처럼 인물의 성장을 그릴 필요도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냥 사건이 생기고 사건에 따라서 인물들이 하나씩 휩쓸려가기만 해도 이야기자체가 경사진곳에서 쫙 떨어지면서 동력을 갖춘다고 할까요. 


사람과 사람이 맞붙기만 해도 그 파장이 계속해서 다른 파장을 일으키면서 이야기의 재미를 만든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이래서 기생수의 이와아키 히토시가 인물 대신 사건을 먼저 그리는 걸 알아내고 스토리를 잘 풀어냈다고 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만화에서는 주인공이 워낙 다혈질이라서 뭐만 건드리면 난리법석을 치는 캐릭터니 좀 반칙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요. ㅋ 꼭 싸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멜로나 역사나 다른 장르에서도 얼마든지 이 사건중심의 재미를 발견할 수 있겠죠? 어쩌면 재미없는 만화들이 왜 재미없는지를 발견한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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