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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혹평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다만 타이카 와이티티 같은 재능넘치는 감독조차도 왜 마블 영화를 만들면 영화가 이렇게 재미없어지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이게 감독의 능력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와 내용 면에서 같은 이야기를 생산하는스튜디오 공정 시스템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블 세계관 안에서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동어반복의 느낌이 강하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누가 나와서 뭘 하든 이런저런 싸움을 하다가 약속된 승리를 거둬갈 겁니다. 왜냐하면 주인공들은 마블의 히어로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위기를 초래하는 적들은 히어로에게 맞춤으로 제공되고 그 과정으로서의 이야기는 느슨해집니다. 주인공이 적을 처음으로 만나 인식하는 도입부와 주인공이 적과 만나 최후의 결전을 펼치는 절정만이 목표이고 이야기는 오히려 이 목적을 채워주는 브릿지에 가깝습니다. 때문에 저는 마블의 모든 작품이 영화라기보다는 프로레슬링에 훨씬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스토리가 부가 되고 인물의 화려한 공격과 싸움이 주가 되기 때문이죠. 문제는 영화라는 장르가 몇분의 화려한 싸움만 보여주기에는 두시간의 런닝타임으로 채워져있다는 것이죠.


프로레슬링은 각종 레슬링 기술을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에 대한 질문과 답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싸움은 왜 이들이 싸우는지 그 이유와 답입니다. 마블영화가 보여주는 싸움들은 주인공이 왜 싸우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무 이야기도 하지 못합니다. 모든 영화가 다크나이트 시리즈나 엑스맨 시리즈처럼 유의미한 스토리 진행을 할 필요는 없겠지만 벌써 몇십번이나 진행되는 "나쁜 외부인(외계인)"을 막는 자경단의 이야기는 그 틀을 아무리 바꿔도 식상한 느낌을 떨치기 어렵죠. 마블의 히어로들은 가만히 대기하고 있다가 누가 쳐들어오면 부리나케 출동하는 형식의 싸움을 하는데, 이 문제가 가장 도드라지는 게 바로 토르 시리즈입니다. 지금처럼 식상해지기 전부터 토르는 계속해서 외적의 침입을 막는 왕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토르 시리즈를 마블의 다른 히어로들과 비교해보면 그 문제는 훨씬 더 도드라집니다. 아이언맨 시리즈는 계속해서 토니 스타크라는 인물의 자아찾기에 주력해왔고 (그래서 그 자아찾기가 제일 헐거웠던 2편의 이야기 밀도가 제일 떨어집니다)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는 정치적 신념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블랙팬서는 인종차별의 피해자들에게 대체세계를 제공하며 이들의 프라이드를 제공했습니다. 이들이 어떤 액션을 펼치든, 그 사이사이에는 이들의 고뇌라거나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충분히 현실적으로 드러나있었다는 점입니다. 그에 반해 토르는 3편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현실세계에 대한 유의미한 질문을 발견하긴 어려운 작품이었고 마블 자체의 노선이 변해가면서 작품 자체의 노선도 황급히 선회한 작품의 선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토르 시리즈가 정면으로 어떤 정치적 질문을 던지면서 그 고뇌를 서사적으로 다루거나 (캡틴 아메리카 2) 환상적인 대체세계가 현실적으로 연결되는(블랙 팬서) 그런 진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토르는 계속해서 끼워넣기만 하고 있죠. 저는 토르: 라그나로크가 던지는 질문이 꽤 유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그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쪽에서는 친구랑 짝짝쿵 코메디를 하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국가라는 영토와 난민이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으니까요.


토르 시리즈의 3편이 이 전까지의 기조를 다 뒤집기위한 몸풀기여서 그렇게 코메디와 정치드라마가 엉켜있는 형태라면, 4편에서는 조금 더 유기적인 형태를 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토르 4편은 제일 산만하면서 자신이 사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는 눈치입니다. 컨셉은 정해져있습니다. 마이트 토르가 등장하고, 발키리도 싸움을 시키고, 신들의 세계에서 버림받은 연기파 배우(...)의 악당도 나오고, 우물쭈물하며 괴력을 선보일 토르도 있습니다. 이 재료들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는지 영화는 집중을 못하는 모양새입니다. 전편에서 다루던 난민의 이야기는 아주 손쉽게 해결이 되었습니다. 아마 트럼프 에이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골랐던 소재여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이제 남은 재료는 로맨스인데, 마이티 토르라는 새로운 여성영웅의 정체성과 전여친이라는 관계 때문에 영화는 어영부영 코메디로 계속 러닝타임을 때웁니다. 신들의 세계에서도 나름 계급이 존재하고 지도자 (신)들은 세계에 무관심하다는 정치적 풍자는 역시나 이 옅은 로맨틱 코메디와 따로 놉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이지만 토르와 발키리를 통해 마이티토르를 신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야기로 나아갔다면 신에 대한 정치적 질문 역시도 더 일관성 있게 흘러가지 않았을까요. 자신을 신이라 부르지만 정작 백수짓과 우주의 방랑자 카우보이를 하는 거 말고는 딱히 하는 게 없는 자아성찰도 될 것이고요.


어쩌면 감독은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안전하게, 모두가 웃고 즐길 수 있는 이야기만 하자는 스튜디오의 압력으로 이렇게 밍밍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건 아닌지 좀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와이카가 감독을 맡은 이후부터 토르는 굉장히 급진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거든요. 전작인 3편 라그나로크부터가 토르에게서 신의 위엄을 빼앗아가고 그를 몸짱 노예 취급하며 전복의 쾌감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번 4편에서는 토르 한명의 신적 위엄이 아니라 신의 세계 전체를 꼬집고 있습니다. 이 질문들은 조금 더 잘 던졌다면 어떘을까 하는 여러가지 아쉬움이 드네요. 하기사 어려운 질문을 모든 연령에게 이해가기 쉽게 풀어놓는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니 마블의 그 방향성만 가지고 칭찬을 해줘야할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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