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도생.

2022.09.18 02:57

잔인한오후 조회 수:876

최근 [고립의 시대]를 읽으며 이 세상 많은 문제들은 외로움에서 비롯되는게 아닐까 하는 관념에 사로잡혔습니다. 당연히 외로움이란 하나의 도구로 여러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과정에서는 경도가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이것 저것이 잘 맞아들지 않나 싶었어요. 책에서 인용한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일부 빌려보면 [전체주의는 외로움을 기반으로 삼는다. 이것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절망적인 경험에 속한다. 전체주의자의 주요 특성은 야만과 퇴보가 아닌 고립과 정상적인 사회관계의 결여이며, 사회에 자기 자리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개인적 자아를 투항함으로써 목적의식과 자긍심을 되찾으려 한다]고 하니 현 시대 세계 극우의 득세에 대한 설명도 해결되죠. 그리고 두 가지 정도의 명제, 도시화와 네트워크화는 외로움을 더 증폭시킨다고 하니 현 시대에 꼭 걸맞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외로움들은 신체에도 타격을 줘서 여러 병증들을 불러온다고 하니 만병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은 이제서야 개인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아마 완전히 획득하고 나서야 이전 문장을 "한국은 이제서야 개인을 획득했습니다."라고 쓰겠죠. 긴 강제적 공동체주의의 끝에 도시화와 익명성에 힘입어 사람들은 개인이 되었고, 아직 그걸로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 헤매는 중입니다. 더 빨리 개인이 된 나라들도 난리니만큼 한국은 더 많은 자유 속에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와 같이 개인으로서는 외롭고, 결국 다시 공동체 - 페미니즘에서는 연대라고 칭해지는 - 를 구성해야 새로운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가장 크게는 기후 문제가 떠오르네요.) 하지만 지금까지 개인에 도달하기 위해 공동체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고 장기적인 비난이 대상이 되었는지를 떠올려 보세요. [네 이웃의 식탁]만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작가들은 일군의 현대적 개인이 모이다가 각각의 특성 때문에 파국에 치닫는 이야기를 잘 조립해서 만들어보려 하지 않습니까. 익명성이 부재한 시골의 공공연한 혐오적 공동체 묘사는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상적인 신-공동체는 어떤 것일까요?


최근 이정재가 에미상 수상을 한 후에 누군가 트위터에서 '이번 에미상 수상을 보니 지금까지의 에미상 수상작들도 별 볼일 없지 않나 싶다'는 말을 했다가 호되게 까이는 걸 봤습니다. 저도 같이 뜨끔했는데 친구들끼리 있는 곳에서 똑같은 말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좀 더 생각해보니, [오징어게임]은 탁월하게 현 신자본주의 시대의 개인과 공동체를, 그 중 외로움을 잘 그려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징어게임]에선 돈을 걸고 일자독식, 각자도생 룰에 따라 행동합니다. 거기엔 우정이나 공동체가 껴들 틈이 없고 시스템이 준 개인 뿐이죠. 그 와중에 이정재는 꽤 바닥에 있는 사람으로 처지를 이입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직도 사람을 믿냐고 물어보는 와중에 이정재는 개인과 개인의 연대로 전진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각자도생이라는 도달 불가능한 규칙에 시달리는 많은 세계인들이 감정이입했나보다 싶었습니다. (과연 후속작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지.)(다른 데스게임들에서 인간들을 감정적이거나 이입할 수 있는 존재로는 잘 안 그리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예전에는 외로울 틈이 없을 정도로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치이고, 매일 매일이 명절이었을 겁니다. 별로 관계에 자원을 들이지 않아도 혈연이라는 이유로 선이 끊어지지 않았죠. 지금이야 노력하지 않으면 혼인신고를 하고도 파기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타자와 관계를 유지하려면 시련이 필요합니다. 그런 급박한 변혁에 노스텔지어를 느끼거나 이유를 모르고 정신 못 차리기도 하고. [관종의 시대]라는, 현 인터넷 주체들의 형태를 장대한 철학적 서사 끝에 서술해내는 책을 읽고 나니, 과거와는 철학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로 다들 살아가게 되었다는 납득이 되더군요. 예컨대, [존재의 의미가 일부 수정되어, 존재의 패러다임에서 관심의 패러다임으로 이행] 되었다는 소리 같은 것 말이죠. 이 책의 말미에서 [오늘날 회복되어야 할 것이 주체성이 아니라 대상성이라면, 그것은 육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갑자기 이 무슨 쌩뚱맞은 소린고 하니, 우리가 사이버 지박령이 될수록 육체는 희미해지고 추방당한다는 거죠. 딴소리입니다만 이런 결론에 이르러서 저는 처음으로 인터넷의 사적 공간에 셀카를 올려볼까 고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인터넷의 공개된 공간에 - 인스타그램은 불구하고 페이스북이라 할지라도 - 제 사진을 올려본 적이 없습니다만, 정말 진실된 파격적 사진들을 올려보고 싶다는 충동이 잠깐 들더군요. 보정이나 필터 등이 얼마나 육체를 추방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요.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얼마나 개인들을 더욱 외롭게 만드는가 하는 헛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많은 혁명들, 챌린지들, 도움들보다는 결국 광화문 앞에서의 육체들이 승리를 거둔게 아닌가 싶은 넷 무용론에 빠지기도 하고요.


최근 어떤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무례는 전염되고(즉 무례하지 않았던 사람도 무례해지고), 특정 공간에서 아주 일부만이 무례하지만 그들의 생산량이 다수를 차지하고, 소수의 무례자로 다수의 이용자가 빠르게 감소한다고 하더군요. [관종의 시대]에서 차단이란 육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궁극의 .. 뭐라 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여튼 개인적으론 차단이 있는 커뮤니티는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용자 다수가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최대한 빠른 조치가 취해져야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횡설수설이지만 결론은 이것입니다. 웹으로 우회해서 외로움을 해소할 수는 없고, 육체로 대면해야 하나보다, 예전에는 온라인으로만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했지만 육체를 대행할 수 있지 않는한 무리구나 하는 반성이었습니다. 개인으로서 앞으로 공동체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궁금증과 함께요. (1인 가구 증가 등등등을 보면 앞으로 외로움 총량은 떨어질 일이 없어 보입니다.) 어디 좋은 모임에 잘 들어가거나 현재 잘 속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이상한 소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밤이 늦어 잠이 안 오니 별 이야기를 다 쓰는군요. (술은 안 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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