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를 다시 떠올리며

2022.09.30 20:17

Sonny 조회 수: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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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에서 고양이는 그저 귀엽고 깜찍한 "선물"이다. 맨 처음 지영이 발견하고 키워왔던 고양이는 혜주의 생일파티에서 혜주를 위한 물건으로 건네진다. 혜주는 고양이를 받고 귀여워하지만 이내 귀찮아하며 다시 가지고 가라고 지영에게 짜증을 낸다. 앙증맞고 깜찍하고 모여있을 때 모두가 좋아하지만,고양이란 존재는 개인의 생활 속에서는 이내 귀찮아져버린다. 어쩌면 고양이는 20대가 되면서 과자처럼 바스라지는 이들의 우정일지도 모른다. 자신도 다른 누구도 형편좋게 책임질 수 없는 우정은 친구들 사이를 떠돌기만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어떤 우정은 집에서 살아갈 틈조차 없다.


집도 먹을 것도 그 어떤 생존능력도 없어보이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갸냘프기만한 아기고양이의 존재는 특히나 스산한 걱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은 예쁜 것이 아닌, 약한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호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장 없이 사회를 방랑하는 갓 스무살 여자들은 전부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싶은 고양이를 닮아있다. 혜주는 앙칼지게 울음소리도 내고 매력을 어필할 줄도 알지만 그도 동경하던 회사 상급자에게 동정을 받는 고양이 취급을 면치 못한다. 자신이 고양이과 맹수로 자라나고 있다는 그 착각을 가장 늦게 깨닫는다는 점에서 혜주의 고양이스러움은 유난히 쓰라린 면이 있다. 그래도 친구들 사이에서 똑부러지고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으로 치고 올라갔으면 좋았을 것을. 사회의 벽에 부딪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동굴 안에서 자신보다 약한 동갑내기 고양이에게 으르렁거리는 것 뿐이다. 


지영은 '길냥이'를 제일 닮아있다. 친구들 중 가장 일찍 독립한 것은 지영의 결심이 아니라 부모없는 혹독한 삶에 떠밀린 결과다. 별다른 지원은 없고 꿈은 저 멀리서 뭉실거리고만 있다. 똑 부러지는 오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내일의 걱정에 당하지 않는 삶 속에서 그의 시야는 짧은 미래만을 향해있다. 도전이란 얼마나 과분한 이야기인가. 금방 무너질 것 같은 집과 거동이 불편한 조부모의 존재를 두고 지영의 침묵은 점점 사나워진다. 마침내 집이 무너졌을 때, 그는 너무 지독한 자유를 얻는다. 돌아갈 곳도 사랑한다 말할 이도 모두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그는 절망한다. 식음을 전폐하고 감옥 속에 처박힌 그의 모습은 살처분을 자처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태희는 가장 고양이스럽게 넉살을 부리는 친구이다. 담벼락 위에서 하염없이 낮잠을 자거나 꼬리를 팔랑거리는 고양이처럼 그는 아버지의 찜질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늘어져있다. 웅대하지도 절박하지도 않은 그는 그냥 쏘다닌다. 놀라운 것은 태희의 발걸음을 이끄는 마음의 행동반경이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환경으로 기꺼이 섞여들어가보려한다. 세상이 꺼려하고 어쩐지 싫은 마음에 멀리하는 존재들의 영역으로 그는 태연히 앞발을 내딛는다. 이것은 단지 선량함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고양이들은 별나게도 개, 소, 말 같은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 인사를 나누고 같이 낮잠을 잔다. 그런 고양이들은 자기보다 크거나 다른 얼룩이 있는 털동물을 빤히 보고 서있는다. 


영화 속에서 가장 위급한 신호를 보내는 것은 지영이다. 그는 가족과 집을 한꺼번에 잃었지만 이제 범죄자가 될 위기에까지 몰려있다. 만약 풀려나온다해도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다. 모든 위로가 섣불러지고 마는 그 상황에서 누가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때 태희가 천연덕스럽게 다가간다. 그것은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오는 공감이나 연민이 아니다. 사람이 비참해 죽겠는데 속도 모르고 다가와서 푹 안기는 고양이처럼, 태희는 지영에게 함께 떠날 것을 제안한다. 그 다정한 뻔뻔함은 과연 태희만의 선천적 체질일까. 착함과 따스함과는 다른 마음으로 함께한다는 이 영화의 낯선 답안을 우리는 얼만큼이나 베낄 수 있을까.


그 둘은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다. 한국에서의 그 어떤 학력도 필요없는 그 곳에서 그 둘은 어떤 도전들을 할 수 있을까. 어떤 고양이들은 바다를 건너 모험을 떠나기도 한다. 크게 얻는 것이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삶의 매 순간은 늘 도약을 위한 다음 단계로만 이뤄지지 않았고 어떤 순간들은 과거와는 완전 다르게 새로운 현재 그 자체로 다가올 테니까. 영화 마지막에는 어쩐지 태희의 그 괴상한 낙천이 옮아버리는 것 같다. 어떻게든 되겠지. 아직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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