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잠시 가는 평화의 길 입니다
죽은 이의 평화

 

   진은영

 

 

 

신선한 보릿단 위에 앉아

금화더미에 앉은 도둑처럼, 모리배처럼

나는 흐뭇해지리

 

호명할 수 없는 기억들로

잔뜩 취해 달은 엎질러진 은빛 술잔 같다

 

이끼와 산딸기의 장난스런 발가락이

내 것 아닌 세월들로

나의 동그란 백골을 두드리리

 

덩굴손들이 자색 향기와 열매를 가득 들고

서둘러 심부름 가는 아이마냥,

내 적막한 침묵을 지나쳐 다른 계절로, 또 다른 술가게들로 들어간다

 

성품이 온유한 안개의 느린 암소만이

축축한 혀로

말라죽은 나무와 건물의 불결한 창을 핥는 거리

 

아무도 기억할 것 없는 골목들이,

기록도, 통곡도 없이 어둡게 늙어가는 벽의 주름진 입가,

 

희미한 어제와 그제들, 가루처럼 바스러진 해[年]들의 뼈다귀, 바지의 해진 무릎이,

다 스미어

 

밤은

살찐 흑인 나부처럼 아름답고 부드럽다

나는 가벼운 손을 뻗어

그녀 품에서 죽어가는 이의, 아직 따듯하고 취한 몸속으로 들어가리

 

너의 입술이

겨울의 한가운데로, 고장 난 창문처럼 활짝 열린다면

 

나는 죽음의 신선한 보릿단 위에 누워

금화더미 위에 누운 도둑처럼,

진실의 모리배처럼 흐뭇하리

 

폭풍에 날아가는 빨간 지붕처럼 활짝 열린다면

                                무방비의 하늘은 내 얼굴 위로 천천히 내려오고

다만, 너의 입술이…

 

 

 

                               —《미네르바》 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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