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애프터썬] 보고 왔습니다

2023.02.11 13:27

Sonny 조회 수: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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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일 평론가의 해설을 어느 정도 듣고 난 후에 쓰는 글입니다(뒷부분은 너무 피곤해서 조느라 못들었습니다 ㅋ)


조금 러프하게 써보겠습니다. 이미 thoma님이 이 영화에 대한 후기와 그걸 또 정정한 댓글이 있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소피의 아버지인 캘럼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이 영화에서는 "왜"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가지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는데, 정성일 평론가는 딱 잘라서 말하더군요. 영화 평을 쓰면서 소설을 쓰면 안된다고. 후기를 쓰는 여러가지 방법 중 자신의 상상을 보태어 이야기를 더 확장시키는 방법도 물론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정성일 평론가의 그 말에 동의합니다. 영화를 가지고 2차 창작을 하는 것과 영화를 정확히 읽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설령 2차 창작을 하더라도 그 원본을 일단 정확히 읽지 않으면 그것은 부정확한 2차 창작이 될 것입니다. 


여러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캘럼은 우울증을 앓고 있다, 캘럼은 사실 게이다, 캘럼은 불치병을 앓고 있다, 캘럼은 자살하기 직전에 여행을 온 것이다... 이 영화에 언뜻 언뜻 드리우는 죽음의 이미지는 심상치 않은 사건을 예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확정적인 증거도 없습니다. 저는 해설을 들으면서 문득 소피가 튀르키 호텔 난간에 서서 밖을 보다가 키스를 하는 게이 커플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현재의 30대 소피가 레즈비언 커플로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연결하고 뒤늦게 아버지의 성정체성을 깨달았다... 는 식으로 혼자 속사정을 발전시키다가 멈췄습니다. 정성일 평론가가 그건 딱 아니라고 제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했거든요. 왜냐하면, 영화에서 캘럼이 두 번이나 말을 합니다. 한번은 자기가 잘될 뻔한 어떤 여자와의 연애에 대해서. 심지어 딸인 소피도 그 여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거짓말은 아닌 거죠. 소피도 그 연애사정을 알고 있는 여자이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미 이혼을 했는데 딸한테 거짓말을 하려고 일부러 어떤 여자와 연애하는 척을 했다가 이제 깨졌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데 이건 이 영화의 성격상 어울리는 연극은 아닙니다. 이 정도까지 사람들이 치밀하게 굴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로 부임온 소피의 담임 선생님이 이쁘다고 캘럼이 큭큭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양성애자일 순 있겠지만 게이는 아니랄 뜻입니다. 그러니까 위의 사례들은 모두 뇌피셜에 가깝죠. 관객은 알 수 없습니다. 한없이 추측할 뿐이죠.


캘럼이 어딘지 우울하고 이상해보인다는 것도 "사실"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종종 캘럼이 혼자 있는 씬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혼자 있는 캘럼은 누가 보고 있는 걸까요? 이 영화에서 관찰자는 소피입니다. 그리고 영화 중간 중간 30대의 소피가 튀어나오기 때문에 이 영화는 캠코더를 보면서 소피가 회상을 하는 것이 자명해집니다. 그러니까 소피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혼자 있는 캘럼을 누가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수상쩍은 장면, 캘럼이 소피를 찾으러 나갔다가 갑자기 어두운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장면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 장면에서 소피는 캘럼을 본 적이 없습니다. 즉 캘럼이 혼자 흐느끼거나 이상하게 행동하는 장면들은 소피가 지금 혼자 상상해낸 장면들입니다. 아마 아빠는 그 때 그랬지 않았을까 하는.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야할 겁니다. 왜 소피는, 자기가 본 적도 없는 아빠의 우울함과 슬픔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고 있냐고요. 그러니까 이 영화는 지금 이 여행 후에 뭔가 그럴만한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암시하고 있습니다. 종종 끼어드는 클럽의 번쩍이는 씬에서 소피는 울부짖듯이 아빠 캘럼을 붙잡고 같이 엉켜있습니다. 현재의 소피가 그 때의 캘럼에게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겠죠. 그게 뭘까. 캘럼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지금 소피는 캘럼을 다시 붙들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이게 제일 일반적인 추리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나오죠. 캘럼이 사실은 자살이든 뭐든 죽어버렸으니까, 소피는 캠코더 영상을 다시 보다가 그 때 자기가 보지 못한 아빠의 고뇌와 방황을 혼자 구성하고, 그걸 캠코더 영상 가운데가운데 끼어넣어서 자신의 추억을 재생하고 있는 중이라고.


이동진 평론가는 캘럼이 튀르키예에서 죽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랬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청개구리 심보가 듭니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쓰면 안되지만, 다른 가능성을 탐색해볼 수는 있습니다. 캘럼이 지금 만약 살아있다면 이 영화는 성립하지 않는 걸까요? 캘럼이 그 때처럼 지금과 쭉 소피와 같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면 이 영화는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영화를 기준으로 귀납을 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연역을 시도해볼 때 저는 이 영화의 가능성이 더 풍부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캘럼은 지금도 아빠로서 소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소피는 다른 이유 때문에 그 때 그 시절의 튀르키예 여행을 곱씹어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살아있는 사람과의 현재진행형인 관계를 과거의 미화되고 편집된 기억이 초월한다는 이상한 공식이 성립합니다. 저는 이 쪽으로도 상상력을 뻗어나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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