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대사치시대의 사치

2023.03.17 03:16

여은성 조회 수:411


 1.지겹네요. 인간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걸까요? 돈을 쓰기 위해 사는 걸까요?


 하지만 어쨌든 돈을 벌기 위해서든 돈을 쓰기 위해서든, 무언가를 사야만 해요. 어쨌든 돈을 쓰긴 써야만 한다는 거죠.



 2.돈을 쓰는 것은 두가지로 나눠져요. 소비재를 사거나 자산을 사거나죠. 소비재를 사는 건 빼도 박도 못하게 돈이 줄어드는 것이고, 자산을 사는 건 어쨌든 돈이 불어나는 것을 기대해 볼 만 해요. 그러니까 나는 소비재보다는...자산을 사는 걸 좋아하죠.



 3.사람들은 어쨌든 무언가를 과시하기 위해 소비재나 사치품을 사곤 해요. 이제는 그게 마치 유행처럼 되어버렸죠. 하지만 과시하는 건 우월감을 얻기 위해서인데, 잘 생각해 보면 우월감을 얻기 위해 꼭 과시할 필요는 없어요. 고급 시계나 스포츠카 같은 걸 안 사도, 부동산이나 주식을 사서 돈을 벌면 그걸로도 우월감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그게 전자보다 나은 점은, 돈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면서 우월감을 얻을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아무에게도 어그로를 끌지 않으면서 우월감을 느낄 수도 있고.



 4.휴.



 5.하지만 역시 그렇게만 살면 심심하니까 가끔씩은 사치품을 사러 나가긴 해야 해요. 굳이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는 이유는 뭘까? 내 생각에 환대받기 위해서예요. 멋진 옷이나 가방, 주얼리를 사면서 잘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깎듯이 대해주는 그 순간이 즐거운거죠. 그리고 그렇게 안면을 튼 판매원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계속 고객으로 남는 것이 오프라인 상점에서 돈을 쓰는 의미예요.


 피트니스 클럽이나 골프 클럽도 그래요. 굳이 피티를 받거나 레슨을 할 필요가 없어도 걔네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피티를 끊고 레슨을 받는 거죠.


 하지만 그것도 역시...사치라는 개념에 부합하는 건 아니예요. 가격표대로의 돈을 건네는 거니까 걔네들과 적절한 관계만이 유지될 뿐, 갑을 관계는 만들 수 없죠.  



 6.생각해 보면 그렇거든요. 요즘 한국인들은 엄청나게 사치품을 사기 때문에, 이제 시계 매장에 수천만원~수억원짜리 시계가 입고되어도 그걸 사가는 사람이 갑이 아니예요. 천만원짜리 시계 따위는 아예 없어서 못 팔 지경이고, 수억원짜리 시계여도 물건이 나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사려고 하니까요. 그 브랜드에서 구매이력이 아주 빠방하고 판매원과 관계를 잘 유지한 고객에게 그걸 살 '기회'가 제공되는 거죠. 

 

 그러니까 고급 브랜드에서 몇천만원~몇억원짜리 시계나 사치품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곳에서 갑이 될 수는 없어요. 오히려 판매하는 놈들이 콧대가 높아져서, 자신들이 고객에게 '살 기회를 준다'라는 식으로 굴고 있으니까요. 


 클럽에서 운동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그렇죠. 어차피 그들과 정가에 운동하는 관계라면 내가 딱히 갑이 되는 게 아니니까요. 외국의 졸부들은 트레이너를 따로 불러서 운동하고 원래 주는 가격의 수십배를 준다던데, 이 정도 씀씀이는 되어야 그들에게 갑으로 군림할 수 있는 거겠죠.



 7.그러니까 내가 규정하는 사치는 결국 '정가를 주고 구매하지 않는 것'이예요. 예전에는 가격표에 써진 가격만 지불하면 그것만으로도 갑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 가격표에 아무리 큰 금액이 적혀 있어도 결국 '정가'를 주고 구매하는 건 갑이 될 수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비교 문화가 더더욱 강해지고 모두가 사치에 눈을 뜬 시대가 됐으니까요. '대사치시대'라고나 할까. 


 그래서 요즘은 더더욱 사치를 하거나 소비재를 사는 데 흥미가 없어진 거예요. 차라리 남들이 시계나 스포츠카 같은 걸로 자랑할 때 더 앞질러 가서 건물을 사는 게 실속도 있고, 더 자랑거리도 되겠죠. 



 8.좀더 분석적으로 말해보자면 2023년 현재의 사치는 '남에게 쉽게 돈을 벌게 해주는 것'이예요. 그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사치인 거죠. 그렇기 때문에 가격표에 1000만원이 써있든 1억원이 써있든 그것은 정가일 뿐이고, 정가를 내고 사치를 경험해 보려는 사람들은 이제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사치품을 사는 데에도 번호표를 들고 기다려야 하는 세상이 된 거죠. 예전에는 어쨌든 필요없는 물건에 천만원을 태우면 부자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더이상은 아니거든요.


 그러니 이제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을 내 보려면, 남에게 쉽게 돈을 벌게 해주는 행위를 통해 갑을관계를 만들어야 해요. 여기서 핵심은 내 돈을 날 위해 쓰는 건 더이상 사치가 아니라는 거죠. 한 끼에 누군가의 한달 월급만큼의 식사를 먹든 한 시간에 100만원짜리 스파를 받든, 그건 가격표에 써진 금액을 지불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한 거니까요. 오너나 직원들 입장에서는, 그냥 제값 주고 서비스를 이용한 고객에 불과한거죠. 굽실거릴 필요없는 고객.


 

 9.그래서 요즘은 내가 돈을 좀 많이 썼나 안 썼나를, 자리에서 일어날 때 사장이(직원 말고) 내 전화번호를 가져가느냐 마느냐로 구분해요. 물론 그런 가게는 합리적인 가게들은 아니죠. 


 결국 쉽게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차려놓은 가게에 가서 돈을 마구 써 줘야 하는데, 그 자리가 끝나고 일어날 때 사장이 번호를 주거나 명함을 준다면? 그건 그럭저럭인 손님이라는 뜻이예요. '연락을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아라'정도의 의미죠. 물론 평범한 손님도 안 되는 것 같으면 그마저도 안 주지만.


 하지만 진짜로 돈을 많이 쓰고 일어날 때는 그쪽에서 내 번호를 받아가는 법인 거죠. 왜냐면 번호를 준 것만으로는 나와 다시 연락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거니까요. '반드시 연락을 유지해야 할 것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면 그날의 소비는 사치라는 단어의 의미에 부합하지 못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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