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의 연비, 노력의 엔진

2023.04.15 19:42

여은성 조회 수:324


 #.요즘 소소하게 화제가 된 골목그림이라는 유튜브 컨텐츠가 있어요. 5년 동안 그림을 그렸다는 사람이 출연했는데 5년 동안 그렸다는 그림치고는 매우 부족한 편이었어요. 이유가 뭘까? 그냥 그림의 재능이 없다...라는 말만으로 넘어가면 너무 뻔하죠. 5년동안 별로 열심히 안한 걸수도 있고 환경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그림을 정말 잘 그리고 싶은 욕구가 있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나마 만만한 게 그림이라서 붙잡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고.



 1.조던 피터슨이나 강용석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순수하게 책상에 앉아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안 돼요. 어쨌든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공부하는 걸로는 최상위급인 사람들이니 어느정도 믿을만한 소리죠. 하루에 8시간동안 순수하게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 날 공부량은 충분하다더군요. 


 하긴 내 생각도 그래요. 그게 공부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하루에 뭔가를 8시간동안 집중해서 한다면 실력이 안 늘 수가 없죠.



 2.한데 문제는 노력이란 게 정말 연비가 중요해요. 석탄을 한 삽 퍼넣으면 마구 끓어오르는 기관도 있고 석탄을 마구 넣어줘도 넣어도 흐물거리는 기관이 있으니까요. 완전히 노베이스에서 1년만에 프로 수준으로 사람을 잘 그리는 중학생이 있는 반면, 5년을 그림그려도 얼기설기 그리는 사람도 있죠.


 결국 노력이란 건 그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연비가 좋아져요.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하는 학생이 음악학과로 가면 완전 꽝이죠. 운동을 하고 싶어하는 학생이 경영학과에 가도 시간낭비고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루에 8시간동안 집중하면서 할 수 있는 거예요.



 3.그런데 이런 문제는 복합적이거든요. 일단 사람이 원하는 게 뭘까? 뭘 해야 향상심이 들 수 있을까? 이건 그냥 맨땅으로는 불가능해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집단에 속해야 하거든요. 아무리 그림에 꿈이 있는 사람이어도 그냥 맨땅으로 혼자 하긴 힘들어요. 


 집단에 들어가서 자신이 존경할 만한 선생님도 만나고, 그 집단 내에서 자신을 설레게 하는...남몰래 연모하는 여학생도 만나게 되고, 그 집단 내에서 자신이 라이벌로 여기게 되는 상대도 마주치게 되어야 하죠. 그리고 자신이 따르고 싶어지는 친절한 선배도 만나고 죽이 맞는 친구도 만나야만 그런 인간관계 안에서 향상심을 낼 수 있는 거예요. 아무리 아웃사이더 기질이 강하다고 해도 이런 상대들이 있는 집단에 속해 있는 게 그 사람에게 건전한 일인 거죠.


 그리고 결국 사람은 맨땅으로 그림을 잘 그리고 싶거나 음악을 잘 하고 싶은 게 아니거든요.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서 나오는 사람들과의 교류, 상대의 인정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거니까요. 그림이 늘었다고 칭찬해 주는 교수, 공모전에서 상을 탄 자신을 축하해주는 친구들...이런 것들이 사람에게 박차를 가하게 만드는 법이예요. 그냥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는, 기관이 끓어오르질 않아요. 그 기관에 순도 높은 연료를 공급해 줘야만 기관이 세차게 가동하는 법이니까요.



 4.휴.



 5.물론 거장들에 대한 동경을 연료삼아 혼자서 고고한 체 하며 틀어박히는 타입의 젊은이들도 있죠. 그야 그것도 좋지만, 너무 멀리 있는 거장들에 대한 동경만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는 건 힘들어요. 그 먼 여정을 외톨이로 혼자서 걸어갈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야 축구나 배구같은 거라면 인싸 기질이 있든 없든 남들이랑 팀 플레이를 해야 하니 그런 문제가 없겠지만, 그림이나 글 같은 분야는 참 힘들죠. 사람들과 굳이 함께해야 하나...라는 생각 때문에 아예 그런 시도를 안 하게 되거든요.



 6.그리고 노력의 정말 무서운 점이 이거예요. 사람이란 생물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잘 하거든요. 수험생이 그냥 불안하다는 이유로 책상 앞에 앉아 있거나 괜히 풀지도 않을 문제집을 사는 경우는 흔하죠. 


 한데 그건 차라리 게임방에 가거나 술을 마시러 가는 것보다도 안좋아요. 왜냐면 차라리 대차게 놀고 나면 후회하고 반성할 거리라도 있거든요. '그동안 실컷 게임하고 술 마셨으니까 이제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말이죠.


 그런데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수험생은 그렇지가 않아요. 왜냐면 자신은 적어도 피시방이나 술집에는 안 가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고 자위하게 되니까요. 내 생각에 그럴 거면 차라리 화끈하게 피씨방 가고 술집 가면서 노는 게 나은 것 같아요. 확실하게 놀고, 확실하게 후회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 게 공부도 잘 될 거니까요.



 7.그런데 그림은 그게 더 심해요. 그래도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은 기계적으로 하고 있으면 문제 하나라도 더 풀거든요. 어쨌든 문제에는 정답이 있기 때문에 더디게라도 문제 풀고 정답 맞추면서 합격에 다가갈 수는 있어요.


 한데 그림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늘 그리는 그림만 그리면? 그렇게 그림그리면 10년을 해도 안 늘어요. 실력은 안 늘고 버릇만 늘게 되는 거죠. 왜냐면 그림은 한 장을 그려도 자기가 편한 그림을 그리면 안 돼요. 자신이 손에 익은 대로 그리는 게 아니라, 계속 틀린 곳을 체크하고 피드백을 받으며 발전시켜 나가야 '합격'에 다가가는 거니까요. 매번 그리는 대로 형태도 틀리고 컬러도 매번 대충 쓰는 그 컬러를 쓰면서 한 장 그려봐야 잘못된 그림만 한장 더 그리는 거거든요.


 적어도 수험 공부는 밍기적대면서 하루에 열 문제라도 풀면 열 문제만큼 합격에 가까워지지만 그림은 타성에 젖은 그림을 백 장 그려봐야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에 노력의 함정에 빠지곤 한단 말이죠. 집단에 속해서 동료들과 함께 절차탁마를 하거나 아주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조언을 받아야 자신의 '엔진'을 끓어오르게 만들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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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건 그 영상들을 보고 그림이나 노력에 관한 것보다는 좀 다른 것 느꼈기 때문이예요. '무기력'이라는 것 말이죠.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면서 스스로 절박하다고 말하는데...글쎄요. 어쩌면 그런 젊은이들에게는 절박함이라는 말조차 사치가 아닌가 싶었어요.


 왜냐하면 절박함이라는 감정도 욕망이나 에너지가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감정이거든요. 이대로는 안된다, 나아지고 싶다라는 기분에서 나오는 거 말이죠. 그리고 영상 속에 나온 사람은 일단 쉬면서 에너지를 충전해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았어요. 에너지를 충전해야 절박함이라는 감정도 나오는 거지, 에너지가 아예 없는데 그런 걸 쥐어짜낼 수는 없으니까요. 


 위에 썼듯이, 가끔 인터넷 보다보면 '1년만에 프로급이 된 중학생' '10개월만에 존잘이 된 그림천재'같은 사례들이 나오죠. 나는 걔네들이 천재라서가 아니라 에너지가 많아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미칠듯한 향상심, 어린 나이에만 가질 수 있는 자의식 같은 것들이 자신의 엔진을 연소시켜서 하루에 남들이 1주일 노력하는 것만큼의 효율을 냈다고 봐요. 똑같은 노력을 해도 노력의 연비 자체가 남들과는 다르니 가능했을 거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순도 높은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시기는 정말 인생에서 얼마 안 돼요. 남들보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하는 사춘기 소녀, 사법고시 한방이면 내 인생이 용으로 변할 거라고 확신하며 공부하던 20대 초반의 강용석...이런 사람들이 그 혜택을 본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환경이 좋지 않거나 하는 일이 잘 안 되어서 인생을 몇년 허비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목표에 집중할 수 있는 정신상태를 되찾기 힘들거든요. 결국 노력이란 건 자신의 엔진이 가장 끓어오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인생의 짧은 시기 안에, 그 엔진에 적합한 종류의 연료를 충분히 넣어줘야 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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