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라는 설정

2023.05.17 09:31

Sonny 조회 수:620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유운성 평론가의 비평에 대한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강의는 재미있었는데 제 육신이 노곤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버려서 잠이 깰 때는 겸연쩍더군요. 그래도 후반부에 영화평론가를 영화 작품이나 감독에게 종속된 직업군인 것처럼, 모더레이터로 활용하는 지금의 기조에 대해 비판조로 말씀하시는 게 꽤 와닿았습니다. 비평은 현재 여행지가 사라져버린 기행문처럼 영화가 없더라도 읽을 수 있는 종류의 글이 되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신선했습니다.


유운성 평론가의 강연 중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멀티버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이야기하면서, 이 영화는 최근의 멀티버스 서사에 당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군요. 스필버그는 본인이 제작에 참여했던 [백 투 더 퓨처]의 타임머신이나, 직접 감독했던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위조 개념으로 정작 본인이 지금의 멀티버스 세계관의 창시자 같은 사람입니다. 어딜 가도 자신과 같은 자신이 있고 과거를 가든 미래를 가든 계속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을 느끼게 된다는 그 설정이 지금은 독립영화에든 상업영화에든 너무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걸 낯설어한다는 것입니다. 멀티버스 설정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의 설정이 크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의 현재로 슉 가버리면 되니까요.


듣고보니 저도 저런 감각을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볼 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살아남은 어벤져스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해결책이 멀티버스였죠. 그걸 보면서 좀 얍삽하다고 느꼈습니다. 죽음이란 사건의 가장 강력한 점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영화의 러닝타임 안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심지어 전편에서 벌어진 죽음이란 사건을 어쩔 수 없이 납득한 관객들에게 '다른 세계로 가면 되지!'라고 하는 게 이 세계의 불변의 법칙을 함부로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픽션이라는 것이 종종 비현실적인 초월적 법칙을 제공해서 쾌감을 제공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모든 불행과 슬픔조차도 간단하게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이 세계관에 대해서는 뭔가 좀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글쎄요, 그게 그렇게 뚝딱 이뤄지는 일일까요.


멀티버스 안에서는 뭐든지 가능합니다. 모두가 바라는 성공과 행복은 물론이고 꿈도 꾸기 싫은 실패와 비참까지도 겪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체험의 전능함을 부여하는 이 세계관 안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과연 현재, 이 곳의 나 자신일까요. 혹은 벌어지지 않은 세계를 근거로 들면서 무한한 가능성에 홀로 취하는 것일까요. 수천만의 세계 중에서 하나뿐인 세계라는 이 관념이 우리에게 어떤 감각을 부여할지 좀 의심스럽습니다. 유운성 평론가는 이 멀티버스를 오가는 느낌이 포르노 서칭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는데(유운성 평론가 본인이 제시한 개념이 아니라 이미 서구 평론가 쪽에서 나왔던 지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식의 유물론적 감각이 우리의 픽션세계설정도 바꾸는 것 같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44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45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6001
123404 그럼 다른 얘기를 해보죠. [11] 갓파쿠 2023.06.09 384
123403 한국인들만 있는 커뮤니티에서 한국인들한테 인종차별에 대해 묻기 [13] Sonny 2023.06.09 611
123402 한국은 인종차별이 다른 나라에 비해 특별히 심한 나라인가? [25] 갓파쿠 2023.06.09 532
123401 한국이 심한 건 인터넷 워리어 같아요 [9] catgotmy 2023.06.09 334
123400 메시, 마이애미로 간다네요 [4] theforce 2023.06.09 179
123399 국내에서 리사 인기가 4위인게 인종차별? [14] 갓파쿠 2023.06.09 719
123398 [왓챠바낭] 좀 특이한 복수극 영화 두 편, '복수의 밤'과 '늑대들' 잡담 [4] 로이배티 2023.06.09 259
123397 프레임드 #454 [4] Lunagazer 2023.06.08 105
123396 프렌즈 시트콤 시즌1 catgotmy 2023.06.08 221
123395 손오공 탐험기 [1] 돌도끼 2023.06.08 201
123394 헐 케인 레알 이적 임박설 [6] daviddain 2023.06.08 200
123393 한국에서의 인종차별 [42] 잘살아보세~ 2023.06.08 1106
123392 못생김 너머 [4] 가봄 2023.06.08 377
123391 엘비스 30 #1 Hits [1] catgotmy 2023.06.08 93
123390 노화된 커뮤니티의 독성 [12] Sonny 2023.06.08 647
123389 인어공주 보다 중간에 나온 이야기 [15] 분홍돼지 2023.06.08 806
123388 레알 마드리드, 주드 벨링엄 영입 합의 [2] daviddain 2023.06.07 124
123387 [웨이브바낭] 정겨운 그 시절 블랙 코미디, '겟 쇼티'를 봤습니다 [11] 로이배티 2023.06.07 340
123386 Killers of the flower moon 읽기 시작 [2] daviddain 2023.06.07 237
123385 프레임드 #453 [4] Lunagazer 2023.06.07 9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