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컴타자라는 취미

2023.07.14 10:00

Sonny 조회 수:310

유희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남는 시간에 반드시 재미를 추구하죠. 아무 것도 안하고 있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 멍을 때린다는 것조차 일종의 명상을 하고 있는 셈이니 "멍"이라는 상태를 위해 머릿속과 가슴속을 비워두는 행위를 한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 번잡한 출근길의 지하철 속에서도 사람들이 한 손으로만 자기 몸을 지탱하면서 웹소설이나 웹툰을 읽고 있는 걸 보면 감탄스럽습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위의 상태가 아닐까요. 요즘같은 다자극, 고자극 시대는 결국 이 인간의 본능이 폭주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이 본능의 도전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 좁은 파티션 안에서 별다른 의무가 주어지지 않을 때마다 뭔가를 하고 싶습니다. 이제 웹서핑은 좀 지겨워졌습니다. 돈이 안드는 인터넷에서 생산적이고 영양가있는 뭔가를 감상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커뮤니티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져서인지 사람들은 이제 에너지틱하게 뭔가를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유튜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뭔가 아주 재미있거나 유용한 그런 정보 혹은 서사는 별로 없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쉬는 시간에 텍스트까지는 읽을 수 있어도 영상을 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아무도 강요안한) 금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할 수 있는 게 뭔가를 읽거나 보는 건데, 밀리의 서재를 탐독하려고 해도 제 집중력은 이미 도둑맞은지 오래인지 몇십분만 쓰면 금새 바닥나버립니다. 물론 일거리가 갑자기 밀어닥치기도 합니다.


무료함의 위기에 몰리니까 뭐라도 찾게 되더군요. 한컴타자라는 취미를 발견했습니다. 그냥 한컴타자 연습만 하면 좀 지루하죠. [메밀꽃 필 무렵]을 도대체 몇번을 타이핑한 것인지. 찾아보니까 한컴타자는 자기가 연습용 표본을 새로 입력할 수 있더군요? 이거다...!! 보다 활동적이면서 제 두뇌를 쇼츠와 폐기물 유머 사이에서 구원해낼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처음에는 이 표본 글을 완성하기 위해 제가 생각하는 좋은 단편 글들을 일일이 타이핑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밀리의 서재에서 복사 기능이 있는 걸 알고 메모장에 더 간편하게 옮겨놓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근대 문학 외에도 타이핑 연습을 할 수 있는 현대적 재료가 생기니 괜히 기분이 좋더군요. 


글을 타이핑하다보니 좀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게 21세기에 새로운 "정독"의 방법은 아닌가 하는 그런 의문도 들더군요. 저는 분명히 이 글을 다른 곳으로 옮겨적는 행위를 하고 있는데, 그 행위를 하면서 단순히 눈으로만 글을 좇던 행위보다 훨씬 더 글을 정성스럽게 읽는 듯한 착각도 살짝 하게 됩니다. 마치 소리내어서 글을 읽듯, 남의 글인데도 제가 직접 쓰는 것처럼 필사의 효과를 느끼게 됩니다. 제 자신이 이 텍스트의 주인인것처럼 원 작가는 디졸브되면서 제가 페이드인하는 느낌? 이 겹쳐짐의 감각이 나름 신선해서 제가 좋아하는 다른 글들에도 이 '스며들기'를 해볼 생각입니다. 


예전에 전자책을 읽는 것보다 실물 책을 읽는 행위가 "손가락으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이 피지컬한 행위의 수고로움 때문에 더 집중력을 향상시킨다는 걸 어디서 본 기억이 납니다. 디지털 독서가 어떤 식으로든 집중력을 흐트러트린다면 결국 타이핑의 수고로움을 직접 들여서 집중력을 보전하게 되는 것일까요. 속도와 정확성에 대한 육체적 훈련이지만 어느새 제가 그 글을 한글자 한글자 씹어먹는 느낌이 들어서 좋습니다. 속도의 시대에 속도를 훈련하면서도 이 손가락 운동이 집중의 효과를 안겨주니 이게 참 디지털 시대의 역설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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