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레시피의 매력

2023.11.17 11:04

Sonny 조회 수:391

듀나게시판이니 서양 명작을 인용하며 글을 시작해봅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결말에는 작은 반전이 하나 숨어있죠. 그것은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모할 때 쓰는 약의 제조법은 그 자체로 불완전했고 본인도 몰랐던 불순물이 섞여있었기 때문에 약효가 발휘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실패나 오류가 포함되어야 비로서 저희가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전에 저희 어머니는 제빵에 꽂힌 적이 있습니다. 그 덕에 정말 많은 빵과 쿠키들을 먹어야했죠. 그 결과물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준수한 수준이었지만 저는 오히려 "파는 거랑 맛이 다르지 않은데?" 라며 별 생각없이 먹었습니다. 그렇게 성공작들을 연이어 출시하던 중 어머니는 카스테라를 만드는데 실패를 하게 됩니다. 제가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베렸다 베렸어 하면서 투덜거리시더군요. 포근포근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가 나와야 하는데 약간 젤리처럼 투명하고 매끈한 뭉탱이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더 좋았습니다. 엄마의 슬픔과 무관하게 저는 아주 환장을 하면서 먹었죠. 그래서 이후로도 실패한 레시피를 엄마에게 요구했습니다. 그 때 그 젤리를 해주라고 말이죠. 저희 어머니는 별나다면서 그 레시피를 해줬습니다. 사먹을 수도 없으니 아주 귀한 음식이었죠.


요즘은 이상하게 휘낭시에에 꽂혀서 종종 사먹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휘낭시에의 가격은 참 사악하죠. 그 작은 덩어리가 2500원, 3000원 이러니까요. 그러던 중 어느 까페에서 싸게 파는 휘낭시에를 발견하고 신나게 사먹었습니다. 사실 휘낭시에 자체의 퀄리티로 치면 저렴한 게 티가 나는 상품입니다. 다른 제과점의 상품들보다 조금 더 기름에 절어있고 버터의 풍미보다 설탕맛이 더 진하기도 하구요. 약간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도넛같은? 그런데... 전 이 휘낭시에가 더 좋습니다. 다른 데서 휘낭시에를 사먹어보니 더 비교가 됩니다. 아마 누가 저에게 휘낭시에를 사다준다면 무척 고맙겠지만 그래도 전 그 저렴한 버젼의 휘낭시에가 더 좋을 것 같아요 ㅋ


모든 것이 다 고급과 저급, 성공작과 실패작으로 나뉘는 건 또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마 제 미뢰는 B급에 영원히 머무르고 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정통 파스타보다 피자집에서 파는 파스타를 더 좋아한다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독일 소세지보다 분홍 소세지를 더 좋아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쨌든 세상의 수많은 미식과 불량식품 사이에서 합의점만 찾아낼 수 있다면 그걸로 또 장땡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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