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읽고.

2024.01.15 17:24

thoma 조회 수:288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었어요.

고등학교 때인가 한 번 읽었던 책입니다. 세부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그때 읽고 나서 감동 받았던 기억만 남아 있었어요. 

이번에 읽고 나서 인상적인 점은 책의 특정 내용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제가 예상보다 재미를 못 느꼈다는 점이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대략적인 내용의 전개를 안다는 것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그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심장이 딱딱해진 점이 가장 크겠죠. 특히 종교에 대해.


대략 줄거리를 안다고 해도 좋은 소설이 주는 감흥은 여러 방향에서 오는 것이라 이 부분은 큰 이유가 아니겠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있어 기억했던 것 보다 고문의 엽기성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장면을 넣어서 전개하지 않고 담담함과 절제가 느껴졌어요. 전체적으로 이런 점은 좋게 보았어요. 크게 긴장을 고조시키는 장면이 없이 가는 소설이었습니다.

 

세부적인 잔재미의 면에서는 아쉬움도 있었어요. 사실 바탕의 작품이라 해도 소설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이 소설이 담담하다해서 건조한 사실적 문체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유형은 아니었으니까요. 인물의 내면 갈등과 희비의 감정적 굴곡이 그대로 표현되는 소설이거든요. 재미 면에서 외국인 신부가 마을 뒷산에 숨어 지내면서 생길 수 있는 이야기들로는 너무 빈약하지 않았나 했습니다. 소설의 초점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해도요. 


인물의 경우 일본인 관리들의 태도와 말이 생생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다루는 일련의 행위에는 이유가 분명했고 그 행위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도 숙련되고 세련되었습니다. 확신과 여유가 있습니다. 이들과 신부의 관계는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 란 말이 생각날 정도지요. 

신부의 내면이 표현되는 부분은 힘이 떨어집니다. 신부의 상황과 갈등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포르투갈을 출발할 때부터, 그게 아니면 중간 기착지인 인도나 마카오에서부터 일본에서 펼쳐질 일들이 예상가능한 범위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의지를 다질 때도 의지가 흔들릴 때도 붙잡고 있는 성경의 구절이나 특히 신부가 어릴 때부터 사랑하고 떠올렸다는 예수의 얼굴에의 집착이 너무 부실한 의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오래 전처럼 종교가 있었다면 원래 진실한 것은 연약한 것이고 흔들리는 것이며 언제나 새로운 상처라는, 긍정적인 쪽의 소감을 가졌을지도요. 지금은 이 소설 감상으로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네요. 예수의 아름다운 얼굴을 자꾸 떠올리는 것이 보통 신자들의 약함이긴 하지만 세상 끝까지 찾아온 사제의 마음 속 풍경이 그러한 것은 너무 빈약해 보이더군요. 

'침묵'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이 그렇게도 야속한 것인가, 그제야 새삼스러운 것인가, 원래 그런 분인지 몰랐던 말인가. 침묵하지 않으면 어쩌란 것인지... 


실제로 순교한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워요. 복잡한 마음이 들고. 

이 소설은 82년에 초판이 나왔고 그 이후 개정판이 나오고 쇄를 거듭했습니다. 그런데도 특정 종교를 다루는 책을 내면서 그 종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제대로 쓰려는 생각이 오랜 세월 없네요. 지식 부족이든 성의 부족이든 암튼 부족한 출판사입니다. '하나님' 표기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이라고 하잖아요.  


다음엔 [사회학으로의 초대]를 읽으려고 합니다. 역시 특별한 이유는 없이 사 둔 책 중에 선택. 그러다 보니 뭔가 좌충우돌식의 읽기입니다. 

s522532323_2.jpg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09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63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576
125764 상한 오렌지 주스 드셔보셨나요? [6] 루비 2011.12.09 9809
125763 러브크래프트 세계의 괴물 나이트건트 Nightgaunt [5] Q 2011.02.22 9809
125762 결혼 안 해주는 남자, 섹스 안 해주는 여자 [54] 닌스트롬 2013.10.01 9806
125761 여친에게 신혼집 공동부담을 제의햇을 때 여자들반응은? [67] carcass 2012.08.07 9791
125760 마셰티 막장영화 최고봉이군요 [5] 가끔영화 2011.07.18 9787
125759 글쓴이 본인을 필자라고 말하기 [26] catgotmy 2015.07.02 9782
125758 26년 vs 허지웅 트위터 사건 [38] menaceT 2012.11.30 9780
125757 [공지] [노란 옷 왕 단편선] 서평 이벤트 (당첨되신 분들은 아티초크 이메일로 이름, 주소, 연락처를 보내주세요.) DJUNA 2014.05.10 9779
125756 왜 서울을 다 싫어하죠. [74] 점례 2012.09.25 9773
125755 테렌스 말릭 - 브래드 피트 & 숀 펜 신작 [트리 오브 라이프] 예고편 [6] 보쿠리코 2010.12.16 9771
125754 남자 키 178이면 꼬꼬마 수준 아닌가요? [7] DaishiRomance 2012.07.14 9760
125753 윤여준은 누구인가? (이동형 정치평론가가 올해초 출판한 책에서 발췌) [8] 데메킨 2012.12.13 9752
125752 '애무의 정석' 짜증나요... [13] 주근깨 2012.01.29 9751
125751 [아주 디테일한 내용 포함] 포*코 에너지 왕xx상무의 대한항공 승무원 폭행.jpg [26] 黑男 2013.04.21 9747
125750 (일부) 성대 전전컴 '이대 특교과 앞에서 "장애인놀이(JM)" ' [23] 黑男 2013.03.16 9745
125749 우리나라 만화가 중에 작화능력이 뛰어난 작가는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33] 작은가방 2012.12.20 9735
125748 ABE 는 어떻게 기획된 시리즈였을까요? [29] 대필작가M 2011.09.11 9734
125747 실내 자전거로 다이어트 시작했어요. [15] 빛을못봐불면증 2011.03.29 9725
125746 정은궐 작가의 정체가 궁금해요 [15] Rcmdr 2012.02.21 9714
125745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는 왜 유언비어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8] Bigcat 2016.11.20 970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