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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에 관한 영화를 굳이 봐야할까? 싶었지만 임순례 감독이 무료 상영회를 열어서 보고 왔습니다. 제가 김대중이란 정치인에 대한 반감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유명한 인물에 대한 전기 영화를 보는 것이 큰 감흥이 없을 것 같았거든요. 보고나서는 꽤나 만족했습니다. 제가 김대중이란 인물에 대해 몇가지 파편적인 사건이나 민주진영의 상징 정도로만 이해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영화라는 건 시공간의 현재성을 공유하는 매체입니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에 대한 기록을 생생한 현장감으로 느끼는 건 또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그가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는 건 알았지만, 그가 연설을 하려고 갈 때마다 정말 많은 인파들이 몰려서 인산인해를 이루더군요. 이렇게 텍스트로만 써놓은 걸 읽었다면 저도 김대중의 인기를 체감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가 박정희의 라이벌로 등장해서 두각을 드러낼 때부터 정치계의 신성이었다는 게 실감이 되더군요. 군부세력과 오래전부터 싸워온 인물이라는 역사도 느끼면서, 정치인으로서 그의 매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목격했습니다. 반공이 국가적 가치였던 당시, 북한과의 협력체계를 일찍부터 주장하는 그에게서 평화에 대한 원대한 야심도 보게 되었습니다.


김대중이 무역업으로 사업에 성공했던 사람이라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돈도 꽤 잘 벌었었다고 하는데, 이후 정치에 계속 도전하면서 그 재산을 모조리 까먹습니다. 정말이지 정치는 돈 없이는 할 수 없는 건가 봅니다. 그의 이 경제인으로서의 이력은 단지 출발점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태도와도 맞물려보입니다. 꽤 의외였던 게 박정희의 일본 차관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수정만 한다면 합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던 부분이나, 박정희의 야당 길들이기를 할 때 일단 제안을 받고 야당으로서의 명맥을 살리자고 하는 부분들은 '손실의 최소화'라는 자본가로서의 면과도 연결되는 듯 합니다. 그 당시에 찬동하거나 수긍하기 어려운 의제들을 김대중은 독단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타협적 면모를 보이는데, 그를 대쪽같은 원칙론자로만 상상하던 저에겐 꽤 신선했습니다. 현실 정치는 극명한 성공이 아니면 어느 지점에서 기득권과의 타협선에 반드시 도달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김대중은 생각보다 꽤 유연하고 프로페셔널한 정치인처럼 보인다고 할까요. 이 모든 게 군홧발 정치를 했던 박정희 시대에 시도되었다는 게 또 신기했습니다.


동시에 다큐는 김대중의 삶이 얼마나 죽음과 맞닿아있었는지도 다룹니다. 그는 625 때부터 처형당할 뻔 했다가 간신히 살아났고 이후에도 박정희가 대놓고 암살을 하려고 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죠. 전두환 정부 때에도 미국으로 망명을 갔다가 귀국길에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의 유력 인사들이 그와 일부러 비행기를 같이 타고 갈 정도였습니다. 정말로 목숨을 걸고 하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무섭게 실감하게 되더군요. 민주주의를 입에 담으면 바로 죽음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테러 말고는 그를 어쩌지 못하는 군부세력의 정치적 열등감도 보여주면서, 또 아무리 인기와 명성이 있어도 모든 것을 꺾어버리는 폭력적 권력의 힘을 실감케 합니다. 이 시대의 말과 진영은, 그 자체로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정치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은 김영삼과 518 민주화항쟁입니다. 실질적으로 김대중은 518 민주화항쟁의 주역은 아닙니다. 그는 당시 전두환에 의해 감옥에 갇혀있었으니까요. 그러나 후에 518 민주화 항쟁에서 전두환이 엄청나게 많은 광주 시민들을 살해했다는 것을 알고 후에 망원동 국립묘지를 찾아가 꺼이꺼이 웁니다. 그것은 아마 희생당한 민주화 투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몇번이나 죽을 뻔 했던 당사자로서 마침내 죽음을 피하지 못했던 이들에 대한 책임감과 공포심이 뒤섞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김대중은 518 민주화 투사들을 단순히 동정하거나 참혹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겪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죽음들을 이들에게서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객관성을 기대하긴 힘듭니다. 김대중도 잘못이 있다, 어떤 단점이 있다는 양비론적 해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종종 그를 중심에 두고 모든 사건들이 그에게서 파생되거나 그를 둘러싸고 일어난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래서 518 시위도 김대중 석방을 위한 운동처럼 그 의의를 김대중에게만 맞추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그의 업적이나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이렇게 다큐멘터리로 직접 보니 그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된 기분입니다. 성대모사의 소재가 아니라 이제 정치인 김대중의 인생이나 굴곡을 어느 정도 알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이런 류의 영화들은 딱 한 시점의 한 인물만을 가리키지 않죠. 암살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이재명을 연상시키고 맙니다. 동시에 박정희나 전두환은 당연히 용산총독부 및 여당 인사들을 떠올리게 만들고요.


@ [킹메이커]는 김대중이란 소재를 그렇게까지 잘 써먹은 것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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