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문학 전집의 붐이 불었던 시기가 있었다는데 요 근래에는 그때를 뛰어넘는 세계문학전집의 대풍인 것 같습니다. 선두주자인 민음사가 1998년에 런칭하면서 거의 매년 100%의 성장률을 달성했는데 이에 고무된 다른 유력출판사들도 이 시장에 뛰어든 것입니다. 워낙 많은 세계문학전집물이 나와있는 터라 출판사 별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미력하게나마 리뷰를 좀 해볼까 합니다.


(1) 민음사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판매량 상위 10선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오늘의 젊은 독자들의 감수성에 맞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라는 모토를 내걸고 1998년에 처음으로 나오기 시작한 전집으로 현재 세계문학전집 시장의 70% 이상을 홀로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 런칭된 만큼 독자들에게 대표적인 세계문학전집으로 각인되고 있으며 250권을 넘길 정도로 출간된 책들도 풍부하고 많은 판권을 보유하고 있어 앞으로도 기대되는 전집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전집이 처음 시작 당시 주목받았던 것은 중역과 축역을 지양하고 한글전용에 원본 번역을 고집해서 기존 세계문학전집류가 갖고 있던 번역의 문제점을 최대한 타개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깔끔하고 일관성 있는 디자인과 번역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 지금처럼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겠습니다. 게다가 알려진 고전들만 번역하는게 아니라 아주 예전의 그리스 고전부터 국내에 초역되는 작품들, 심지어는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 같은 한국소설도 시리즈에 끼워넣었다는 점도 특이할만한 꺼리라 하겠습니다.


출간된지 오래되었고 그만큼 많은 권수가 나오다보니 민음사 전집에 쏟아지는 지적도 적지 않습니다. 가장 큰 것은 민음사가 그렇게 자신했던 번역의 문제입니다. 중역을 지양하겠다고 했는데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인 <변신 이야기>부터가 중역이었고, 가장 많이 팔린 책인 <호밀밭의 파수꾼>도 끊임없이 번역 논란에 시달리는 책이기도 합니다. 특히 <중국신화전설>은 과거 대우학술총서로 나왔던 것을 본문 일부와 주석을 떼어먹고 재출간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젊은 독자들의 감수성에 맞게' 책을 보급하려다 보니 이러한 무리수들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또한 250권이 넘어가는 방대한 라인업의 대부분이 이미 소개되었던 유럽과 영미 문학에 치중되어 있어 비교적 뻔하다는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점차 초역되는 작품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으니 앞으로의 개선을 기대해볼 법하며 여러 문학전집들 중에서 양장으로 출간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것도 강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디자인의 측면에서 덧붙이자면 세로로 약간 길쭉하고 책이 쫙 펴지지 않는 단점 때문에 읽기가 힘들다고 불평하는 독자들도 적지 않더군요.


업계 1위의 대형 출판사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자들에 대한 대우가 박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확인된 바는 아니라 신뢰도 보장을 못하겠네요.



(2) 을유세계문학전집


         

▲ 을유세계문학전집의 판매량 상위 10선


1945년에 시작된 역사가 오랜 출판사답게 이미 1970년대에 한 차례의 세계문학전집을 간행한 바가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아예 새로운 목록과 번역으로 2008년부터 전집을 간행하고 있습니다. 양장본을 고집하는 터라 디자인이 다소 딱딱해보이고 가격대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통일성이나 가독성의 측면에서 디자인에는 합격점을 주고 싶습니다.


독자들에게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전집이지만 사실 상당히 많은 강점을 갖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전집의 구성이 상당히 균형이 있다는 점입니다. 잘 알려진 고전들과 초역되는 작품들이 적절한 배분으로 섞여 있으며 국가별 안배도 적절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전집 최대의 장점은 번역 시스템입니다. 중역을 지양하겠다 해놓고서는 시리즈의 1번을 중역작품으로 내서 그 선언의 진정성을 의심케한 민음사와는 달리 을유의 시리즈 1번인 <마의 산>은 토마스 만 전문가가 상당히 공들여서 번역한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일본어 중역의 오역 제목이라며 판매량에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젊은 베르터의 고통>으로 교정해서 출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을유는 "논문에 인용될 수 있는 번역"을 지향하는 터라 해당 작가의 전문가에 의한 번역, 5인 편집위원에 의한 만장일치제, 그리고 번역의 3중 교차 점검을 하는 상당히 빡빡한 시스템을 통해 출간됩니다. 그런 탓인지 한 달에 많아야 2-3권이 나올 만큼 출간 속도는 상당히 더딥니다만 아직까지 번역 시비에 휘말린 적은 없었습니다. 앞으로 총 300권까지 출간될 예정이라 합니다.


다만 안정적인 번역 퀄리티임에도 불구하고 문장이 어렵고 딱딱한 경향이 있어서 청소년이나 대학 초년생 독자들에게는 권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3) 펭귄 클래식


         

▲ 펭귄 클래식의 판매량 상위 10선


펭귄 클래식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 출판 시리즈물인데 웅진단행본과 계약을 하고 단기간동안 많은 책들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모토는 "가장 정확한 번역, 가장 뛰어난 서문,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과 가장 적합한 가격"이라는데 한국에서 출간되는 시리즈가 이 모토를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서문이 비교적 풍부한 것과 빠른 출간 속도에도 불구하고 번역에 큰 잡음이 없었던 것은 주목할만 합니다만 페이퍼백 스타일의 가벼운 디자인에는 호불호가 좀 갈릴 것 같습니다. 다만 글씨체는 좀 큼직한 편이라 가독성은 좋더군요. 문장들도 술술 읽히는 편이라 청소년들에게 권하기도 좋고요.


재미있게도 가장 지적하고 싶은 점은 바로 가격입니다. 펭귄 클래식은 원래 저작권이 풀린 고전을 염가에 보급한다는 것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국내의 펭귄 클래식은 그런 양질의 '염가' 시리즈 물로서는 큰 메리트가 없습니다. 과거 출판도서에 한해 인터넷 서점에서는 50% 할인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정가가 10000원 이상이고 심지어 가장 최근 출간된 <시학>은 비록 600페이지가 넘는다고 하나 펭귄 시리즈에는 어울리지 않는 18000원이 정가더군요.


이 시리즈의 리스트에서의 강점은 최근 출간되는 세계문학전집류 중 많은 인문영역의 도서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뭔가 포지션이 어정쩡한 전집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4) 대산세계문학총서


         

▲ 대산세계문학총서의 판매량 상위 10선


교보그룹 창업주인 대산 신용호 회장이 세운 대산문화재단에서 기획하고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는 전집물로 대기업의 자본이 바탕이 된 터라 여러가지 측면에서 강점을 갖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이 총서의 최대 강점은 바로 그 리스트입니다. 고만고만한 고전들로 리스트의 대다수를 채워서 각 전집물 별로 중복되는 것이 적지 않은데 이 시리즈는 무려 90%가 국내 초역입니다. 게다가 다른 어떤 전집류보다도 시의 비중에 높아서 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선택해볼만 하죠.


번역의 퀄리티도 좋은 편이며 주석도 풍부한데 이는 공모제라는 독특한 시스템의 결과로 보입니다. 즉, 재단에서 번역가에게 의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번역가들이 응모를 해서 심사를 거쳐 선정을 하는 것이죠. 번역가에 대한 대우도 이쪽에서는 가장 좋다고 하네요. 투자한만큼 책의 질이 보장되는 것이죠.


초기에는 하드커버에 하얀 색 표지의 다소 밋밋한 디자인으로 출간되었습니다만 이제는 하드 커버를 포기하고 각 도서별로 표지 디자인도 다르게 하여 출간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가격대가 조금 내려갔으니 독자로서는 반길만한 일입니다.


다만 초역 90%라는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반 독자들에게는 너무 생소하며 학술도서 같은 느낌도 강한지라 팔리지 않는 책이 많습니다. 해서 전집류임에도 불구하고 품절 도서들도 제법 끼어있습니다. 다소 진부한 고전문학 시리즈에 식상한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활로 같은 전집류라 할 수 있겠습니다.



(5) 열린책들 세계문학


         

▲ 열린책들 세계문학의 판매량 상위 10선


과거에 "Mr.Know 세계문학"이라는 염가판 시리즈물을 접고 새로이 런칭한 전집류입니다. 표지를 조금 바꾸고 가격을 올린 후 다른 것은 대부분 그대로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열린책들답게 세련된 디자인과 깔끔한 판형으로 주목받고 있기는 합니다만 빡빡한 자간과 열린책들 특유의 고유 명사 표기 때문에 읽기 힘들다고 하시는 분들도 꽤나 계십니다.


라인업은 전통의 고전부터 비교적 최근의 소설에 장르 문학까지 들어있는 등 스펙트럼의 측면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하겠습니다만 사실 이 출판사의 책을 자주 눈여겨 보신 분이라면 기존에 나왔던 책들을 <열린책들 세계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몽땅 집어넣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키리냐가>나 <미사고의 숲> 같은 SF 소설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집을 몽땅 여기에 끼워넣는 등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참신성은 오히려 떨어집니다. 게다가 예전에 단권으로 나왔던 <신곡>을 세 권으로 분책하거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을 3권으로 분책하는 등 분책으로 인한 가격 상승도 비판받고 있습니다.


다만 번역에 있어서 크게 지적받은 경우가 드물고 (초기에 지적을 많이 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 전집들은 개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안정세로 접어든 듯 합니다) 디자인이 아름다운 점은 장점이라 보이네요.



(6)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판매량 상위 10선


메이저 출판사인 문학동네가 5년간 준비한 끝에 2009년부터 출간하기 시작한 전집류의 후발주자입니다. 모토는 "대가들의 묻힌 작품을 발굴하여 정본을 만든다". 묻힌 작품을 발굴한다는 모토를 생각해보면 리스트가 조금 심심한 느낌은 있습니다만 점점 발간될 수록 새로운 작품들이 등장해서 실망을 시키지는 않더군요. 현재는 30% 정도가 초역입니다만 곧 50%대까지 끌어올리겠다고 하더군요.


이 시리즈의 번역 시스템도 조금 독특한데 각 언어별 전공자들로 8인 편집위원회를 꾸리고 그들이 목록선정부터 번역의뢰까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번역은 번역가가 하는 것이라 이 편집위원회의 책임 시스템이 "을유"나 "대산"의 번역 시스템 이상으로 얼마나 큰 성과를 보여줄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인기 소설가 김영하를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가로 선정하는 등 나름 스타 번역가 도입에도 공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메이저 출판사 답게 책의 디자인은 아주 좋은 편이며 특히 양장본과 반양장본이 동시에 출간되어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힌 점은 고무적입니다.



(7) 범우 비평판 세계 문학선


         

▲ 범우비평판 세계문학선의 판매량 상위 10선


지금과 같이 세계문학전집의 중흥기가 오기 전에는 나름 전통의 문학전집으로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시리즈입니다. 날림 번역이 많았던 시절에도 나름 훌륭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번역 작품을 내면서 인기를 모았었습니다. 예를 들어 김붕구가 번역한 <적과 흑>은 아직까지도 이 책의 마스터피스로 불리우고 있죠.


그러나 워낙 낡은 시리즈물인지라 번역의 문장이 시대가 지났다는 느낌이 강하며 전집류의 디자인으로서는 통일성이 전혀 없는 최악의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새로운 시리즈가 출간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전통의 고풍스러운 번역물로서의 가치는 아직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8) 동서문화사 월드북


         

▲ 동서문화사 월드북의 판매량 상위 10선


범우비평판 세계문학선처럼 나름 전통의 전집류이고 리스트에 다수의 인문교양서를 포함하는 등 여러 가지 장점이 돋보이기는 합니다만 결정적으로 중역의 비중이 다른 출판사들보다는 높은 편이라 번역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또한 낡고 고루한 디자인 역시 문제이고요. 가격에 대한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세계문학전집이 많은 요즘 굳이 선택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9)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의 판매량 상위 5선


'우리시대', '고전의 세계' 시리즈물로 호평을 받자 이에 고무되어 출간했던 세계문학 시리즈물입니다. 2009년 이후로는 새로운 책이 출간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지만 리스트도 참신하고 두꺼운 문학들보다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분량의 문학들을 주로 출간하여 가격면에서도 강점이 많았던 전집류입니다. 양질의 번역이며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판형의 세계문학전집으로서 주목할만 하였는데 1년이 넘게 출간이 중단되었다는 점이 아쉽다 하겠네요.



(10) 창비세계문학


    

▲ 창비세계문학의 판매량 상위 5선


모두 9권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물은 독특하게도 단편 문학만을 모아놓은 일종의 선집입니다. 문체도 평이하고 해설도 풍부하여 청소년이나 대학 초년생이 읽기에도 부담이 없으며 이런 단편 문학은 소개될 기회가 없다는 점에서 괜찮은 전집류라 하겠습니다.




전집류라는 건 일종의 콜렉터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보신 바와 같이 자신이 콜렉터가 아니시라면 각 출판사마다 강점을 갖는 번역류가 있으니 취사선택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특히 고전을 읽는 분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있는 "닥치고 민음사 고고씽"은 지양하는 것이 좋을 듯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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