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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덕희]를 보고 조금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 한편에 대한 감상보다는 총합적인 감상을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다소 가볍게 적어봅니다.


보이스피싱이란 소재를 두고 이미 [보이스]란 변요한, 김무열 주연의 영화가 개봉했었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같은 소재의 영화가 나온다는 게 동어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는데 [시민덕희]는 확실한 변별력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의 성별, 보이스피싱 조직을 추적하는 과정, 영화 전체의 활극적인 분위기, 개성있는 캐릭터들의 감초식 코메디 등... 시간 때우기로 나쁘지 않게 봤습니다.


일단 주연배우인 라미란이 가진 배우로서의 장악력에 감탄했습니다. 냉정하게 봤을 때 라미란 배우는 현재 상업영화에서 원톱 여성주연배우로서 제일 잘 나가는 분이 아닐까요? 한 작품 안에서 코메디와 드라마를 능수능란하게 표현하시는데 이 정도로 하면서 인지도와 호감도 높은 다른 대체배우가 생각이 안나더라고요. 


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는 사건이 아니다'란 말을 곱씹었습니다. 발단전개절정결말의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 생기고 그 사건에 주인공이 휘말리고 난관에 부딪히고 그걸 극복하는 게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흐름인데 이렇게 흘러가다보니까 영화 속 인물들이 사건에 좀 떠밀려간다는 느낌을 받게 되더군요.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무엇일지 생각해봤습니다. 덕희는 왜 보이스피싱 총책을 굳이 중국까지 가서 잡으려고 하는 것일까... 이 일련의 사건들도 하나의 결과입니다. 그 원인은 덕희의 돈을 보이스피싱 조직이 사기쳐서 떼먹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내 돈 떼먹은 놈을 족치는 영화입니다. 내 돈 떼먹은 놈을 족치는 주된 감정은 울분입니다. 이 영화는 덕희의 울분을 동력으로 삼는 드라마죠. 안그러면 미쳤다고 평범한 40대 여성이 중국까지 날아가서 그 위험한 보이스피싱 조직을 수색하고 염탐하고 그러겠어요. 덕희는 돈을 사기당해서 지금 반쯤 돌아버린 상태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울분을 사건의 전제로만 깔아두고 무난하게 다음 사건과 사건을 연결지으며 영화를 끌고 나가는 인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평이해져버리죠. 결말에 다다르면 초반의 울분이 좀 뭉개졌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 지점에서 [보이스]와 비교를 하면 좀 아쉽습니다. [보이스]는 주인공이 분명히 말을 합니다. 그 새끼 죽일 거라고. 그러니까 주인공의 이 모든 미친 짓이 조금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울분의 대상에 대해 탐구합니다. 물론 [보이스]도 사건 위주로 이야기를 끌고 가니까 그 감정의 희석되었다는 느낌은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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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감독인 박영주 감독님이 이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전작인 [선희와 슬기]에서 리플리 증후군 비슷한 심리로 도피를 일삼는 주인공의 감정을 섬세하게 찍으셨던 분이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주인공의 감정선을 세밀하게 따라가기에 투자자들, 제작자들의 입김이 여기저기 들어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무는 노덕 감독의 [특종: 량첸 살인기]와 좀 기시감을 느낍니다. 그 영화도 사건들이 꼬리를 물면서 겉잡을 수 없이 꼬이죠.


보이스피싱 집단의 재민에게 덕희가 속아 돈을 잃고, 재민이 느닷없이 전화해 보이스피싱 조직의 정보를 건네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덕희가 중국까지 가고, 후에 총책까지 추적해내는 이 사건들 속에서 영화는 종종 코메디와 액션을 오갑니다. 이쯤해서 웃기고, 이쯤해서 싸움 한번 해주고, 그런 리듬에 맞춘 작은 사건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게 상업영화의 틀에 갇힌 느낌이더라구요. 재미가 없진 않았습니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고 웃길 때 웃겨주고 무서워질 때 또 무서워집니다. 이걸 보면서 저도 "다음 사건"을 기다립니다. 웃겨주거나, 무섭게 해주거나, 신나게 해주는 어떤 장면들이요.


아마 제가 이렇게 주절거리는 것은 이 소재가 워낙 공감이 갈만한, 좋은 이야깃거리라서 그런 것이겠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돈을 사기친 놈이라니, 얼마나 나쁜 놈입니까.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죠. 그런데 그런 놈이 자길 도와달랩니다. 이 얼마나 미치고 팔짝 뛰는 노릇이겠어요. 여기서 영화가 실수를 저질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영화는 이 두 인물을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약자로 포지셔닝하고 연대라는 행위로 보다 사회적인 해석을 시도합니다. 두 사람 다 모두 피해자이니 서로 도울 수 있지 않겠냐는거죠. 물론 영화의 가장 큰 동력은 보이스피싱 총책을 잡으면 포상금이 1억까지 나온다는 것입니다만, 영화 전체적으로 이 둘을 바라보는 시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둘 다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다소 뭉툭한 온정입니다. 이렇게 흘러가면서 덕희가 재민을 증오해 마땅한 그 자본주의적 복수심은 좀 흐려져버리는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철저히 자본주의적 원칙에 입각했다면, 다들 속물들이었다면 영화가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이건 저의 취향에 입각한 가정법입니다. 그래도 이 영화의 온기와 정의감 넘치는 엔딩이 다소 고루해보였다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내 돈 뺏어간 놈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내 인생 망친 놈을 용서할 수가 없어서, 서로 속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 벌리고 잡아주는 그런 추접한 의존 속에서 알 수 없는 정이 들었으면 그건 또 그것대로 차가운 가운데 따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실화 주인공이 경찰한테 포상금을 못받았다는 결말을 에필로그가 아니라 정식 결말로 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씁쓸하면서도 멋진 엔딩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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