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7호선을 타고 가다가 고약한 할머니를 목격했습니다. 그 분은 제가 앉은 좌석열 건너편의 좌석쪽에서 뭐라뭐라 불평을 하기 시작하시더군요. 누가 자기를 치고 갔네 어쨌네 하면서 투덜거리시더니, 하나 남은 빈 자리에 낑겨 앉아서는 소란을 계속 피웠습니다. 그 분이 주로 하는 말들은 '못생긴 놈', '못생긴 년', '뚱뚱한 것들이 왜 이렇게 옆의 사람을 괴롭혀', '뭘 쳐다봐', '왜 이렇게 나이많은 사람을 괴롭혀'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 중에 제일 황당한 건 이 말이었습니다. '차도 없어서 지하철 타고 댕기는 것들이!!' 에... 차가 없는 게 못난 거라면 지하철을 탄 본인은...??


그 분의 민폐력이 어찌나 사나웠는지 그 분이 앉자 주변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이 다 빠져버리더군요. 양 옆으로 서너명씩 우르르 일어나서 다른 칸으로 가버리시자 그 자리는 그 할머니가 독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이제 원하는 바를 다 이루었을텐데, 자기만 혼자 앉아있는 게 좀 민망했을까요? 저희쪽 좌석으로 오더니 어떤 젊은 여성분에게 저 자리는 먼지가 너무 많다면서 자리 좀 바꿔주라고, 빨리 일어나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 젊은 여성분은 개떡같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른 칸으로 가버렸고 예상대로 다시 횡포가 시작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뚱뚱한 놈들이 자꾸 사람을 밀어! 이 못생긴 놈 못생긴 년 차도 없어서 지하철 타고 다니는 것들이~! 그 분 옆으로 또 두좌석씩 빈자리가 생겼고 저는 일어나기 싫어서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저한테 시비를 걸면 이 사람을 어떻게 제압해야할까 망상만 한 가득 하면서요. 그러던 중 그 할머니 옆의 빈 좌석에 어떤 젊은 남자가 앉을려고 하니까 거기에 손을 올리고 못앉게 하면서 살짝 실랑이가 생겼습니다. 다행히도 그 할머니와 저는 아무 갈등이 없었습니다. 저는 내려야 하는 곳에서 내렸고 그렇게 그 악연은 끝이 났습니다.


그럼에도 그 할머니를 인격의 문제 이상으로 고민하게 되더군요. 그 할머니를 미쳤다고 욕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비난할 때 그 핵심은 그의 무례, 그의 사회적 실패일 것입니다. 그리고 지하철은 의외로 평등한 공간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지시를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규정과 그에 따른 규제가 강하게 작동하는 곳도 아닙니다. 오로지 매너만으로 서로 불편을 최소화하는 그런 곳이죠. 저는 지하철에 내렸으니 사태가 일단락되었고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재가 거의 없는 평등한 공간에서, 누구도 내리지 못하고 몇년을 지속적으로 탑승을 하는데 누군가 그 사회적 합의를 이유없이 부수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정말 모르겠더군요. 2020년 이후로 가장 흔해진 한국적 논리인 'If 마동석' 추론도 이 경우에는 썩 유효해보이진 않았습니다.


시스템으로는 아마 단순한 해결책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예외적인 무뢰한을 처벌하고 격리하는 규제책을 작동시키든가, 아니면 다른 어떤 폭력이나 갈등에도 휘말리기 싫은 사람들이 끝까지 참고 무시한다든가. 그 해결책 가운데 인간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타인과의 공존을 가르치는 방식은 완전히 비현실적이란 점이 또 서늘해집니다. 그것은 어떤 실효성도 없을테니까요. 지하철 광인들은 이제 익숙한 존재들이지만 어제 그 분이 기억에 남는 건, 그 분이 결국 쿠데타에 성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못생긴 것들과 뚱뚱한 것들을 미워하는 자신만의 규칙과 자기 존재를 밀어붙이면서 그가 쟁취해낼 수 있었던 건 널찍한 빈자리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사람들 사이의 좁아터진 빈 좌석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공유 공간을 사유화하는 것. 그 시도가 성공한다해도 그 사유지에는 자신밖에 남지 않겠지요. 


@ 예의바른 사회적 융화를 요구하는 이런 글이 보다 복잡한 맥락을 가진 약자들의 투쟁에 똑같이 적용될까봐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모든 행패와 투쟁을 다 동치시킬 수는 없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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