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시트콤

2010.12.30 13:03

푸른새벽 조회 수:2241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알게 된 여자애가 있었습니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을 통해 만났는데 친구들과 함께 자주 만나서 놀고 느낌이 좋았어요.

예쁘장하고 애교가 무척 많은 스타일이었죠. 교복을 벗고 세상이 다 내 것 같던 시절이라 더 예뻐 보였던 것 같습니다. 

확인만 안했을 뿐 서로를 맘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아. 이건 나중에 듣게 된 얘기.

제가 눈치가 별로 없어서 당시에는 저 혼자만 그런 줄 알았습니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제가 갑자기 다른 여자애와 사귀게 됐습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돼버렸어요.

지금까지 연애를 많이 해보진 않았지만 모두 시작은 우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보니.

 

아무튼 그 여자애와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됐고 처음으로 달콤한 연애를 즐겼죠.

이전까진 편지나 주고 받고 전화 통화나 하던 풋내기 이성 교제만 하다가

손 잡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뽀뽀도 하고 그런 진짜 연애를 하게 된 겁니다.  

그러던 중 한참 지나서 저 여자애를 다시 보게 됐는데 그때 예전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실은 저를 알게 된 후부터 많이 좋아해 매일 내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일기도 썼다고.

그런데 갑자기 제가 여자친구가 생겼다 그래서 정말 충격적이었다고. 울기도 많이 울고 일기는 불태워버렸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좀 오그라드는 얘기지만 그 여자애 스타일을 보면 정말 그랬을 것 같았습니다.

 

서로의 맘을 몰랐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이미 저는 여자친구가 있는 몸. 

때문에 애틋하다는 이상의 감정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서로가 엇갈린 인연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주 가끔 친구들을 통해 안부만 전해듣는 사이가 됐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제가 조금만 나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리곤 하던 마냥 아이같던 제 여친은 아이러브스쿨 바람이 나서 저를 찼습니다.

실연의 아픔은 정말 죽겠더군요. 저는 지금도 아이러브스쿨 망한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만세를 부릅니다.

 

괴롭게 지내다 겨우 진정이 좀 될 무렵에 그 여자애를 다시 보게 됐어요.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과 연락이 닿아서 몇 년 만에 다시 어울리게 됐죠. 그 애도 그동안 연애도 했고 이별도 했다 그랬습니다.

친구들과 다시 예전처럼 어울려서 놀고 그랬는데 왠지 예전과 느낌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여전히 예쁘고 애교도 넘치는 사랑스러운 아이었지만 뭔가 달랐어요.

함께 어울리다보니 서로 엇갈렸던 과거를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습니다.

좀 염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원래 그리 적극적인 편이 못되는지라. 그런데 이 여자애가 제 절친한 친구 중 한 명과 더 가깝게 지내더군요.

저 때문에 알게 된 사인데 정작 저를 멀리하면서 자기들끼리 더 자주 어울리는 그런 상황이 됐습니다.

 

게다가 그때가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는데 그 여자애가 제 친구에게 크리스마스때 2박3일인가 여행을 가자고 그랬다는 겁니다.

단 둘은 아니고 여자 친구 한 명 더 해서 서울도 가고 바다도 가고.

저는 처음엔 그 여자애가 제 친구에게 그런 제안을 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실을 인정하고 난 후엔 심통이 나더군요. 왜 내게 가자고 안하고 내 친구에게 가자고 했을까. 설마 이 녀석을 좋아하게 됐나?

제 친구에게 갈거냐고 물어봤습니다. 친구는 당연하다는 듯이 가겠다고 하더군요. 야. 너 걔하고 나하고 어떤 사인지 알잖냐.

그런데 너가 걔랑 그렇게 되면 안되지라며 어르기도 하고 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책망도 했지만

친구는 제 얘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자애를 택하겠다는 기세였습니다.

걔가 나한테 살갑게 대하고 그러니까 나도 걔가 좋아졌다. 이번 여행도 갈거다. 니가 걔랑 사귄 것도 아니잖냐. 그러니 신경쓰지 마라.

와. 여자때문에 친구 사이 금간다는 게 이런 거였구나. 내가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이야. 막 괴로웠습니다. 

매력적인 그 여자애를 다시 놓쳤다는 사실과 친한 친구까지 잃게 됐다는 사실 때문에. 

원래 이 녀석이 그렇게 가벼운 놈이 아닌데 그 여자애가 꼬셔도 단단히 꼬셔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상심한 채로 그 해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했죠.

 

그런데 26일인가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이 시키 염장지르려고 전화했나라고 생각하면서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잠시 후 박장대소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친구가 그 여자애와 함께 간 곳은 서울 모처의 다단계 업체.

그곳에서 크리스마스 내내 낮에는 교육받고 밤에는 감시 속에 좁은 숙소에서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과 뒤엉켜서 잤다고 합니다.

사흘간의 교육을 마치고 겨우 빠져나와서 제게 전화를 한 겁니다. 저는 불퉁스럽게 전화를 받다가 친구의 얘기를 듣고

미친 듯이 웃었습니다. 지금까지 제 생에 가장 통쾌한 반전이었죠. 

한 참 지나서는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그래도 그 여자애가 날 생각해준 거였어. 라고 자위를 합니다.

 

 

 

2년 전인가 이 여자애를 다시 만나서 시트콤을 한 편 더 찍었는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07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62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541
72 로열 패밀리가 시작했지만 불판은 없고... [19] 로이배티 2011.04.07 1872
71 심형래 비판하는 해외 평론가 [9] chobo 2011.04.05 3433
70 하니앤선 이 홍차 정체가 뭔가요? [5] 세이지 2011.04.04 2233
69 홈플러스, 1000원짜리 `착한 생닭` 20만두 판매 [8] chobo 2011.03.23 2486
68 [백신 돌리는 동안 바낭] 파수꾼 좋았어요 [4] calmaria 2011.03.06 1835
67 [자취+요리 바낭] 배가 고파요... ㅠㅠ [3] at the most 2011.03.04 2005
66 한국인과 유대인이 비슷한 점이 있을까요? [20] 자본주의의돼지 2011.03.02 4391
65 스마트폰으로 문서작업? [8] Spitz 2011.02.21 2500
64 만추가 라푼젤을 밀어내는군요. 그외 개인적인 잡담 [5] 가라 2011.02.16 3240
63 애프터스쿨과 작업한 두리차. [1] 타보 2011.02.10 1699
62 [듀나인] 고양이 퇴치제 같은 것 있나요? [6] 가라 2011.02.06 3836
61 차범근 해설위원 "박지성 은퇴…내 비겁함이 부끄럽다" [5] niner 2011.02.01 3721
60 [바낭] 마봉춘 뉴스데스크 보기가 불편해요. [8] 수지니야 2011.01.31 3053
59 이성에게 어필하는 옷차림 [4] 미나 2011.01.24 2954
58 [듀나in] 새로 바뀐 집주인이 한달만에 나가라는군요 [4] 또익명 2011.01.03 2933
57 전세계를 낚은(?) 심심풀이 낚서~~ [11] windlike 2010.12.30 2936
» 내 인생의 시트콤 [10] 푸른새벽 2010.12.30 2241
55 허경영 명함 [8] chobo 2010.12.28 3600
54 효소직구는 무사히 완료!/ 얼굴에 고양이 수염이 생겼어요. [2] Paul. 2010.12.19 2147
53 게임 셧다운제에 대항하는 청소년 게이머의 대안 [2] catgotmy 2010.12.14 220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