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밧드의 모험

2010.06.09 04:49

차가운 달 조회 수:3833




기묘한 꿈 속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는 순간
꿈은 모두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조용한 오전의 골목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누운 채 빗소리를 들었다.

어떤 꿈이었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간밤의 꿈을 기억하려 애쓰는 것.
희미해져 가는 추억을 붙잡으려 애쓰는 것.
나는 그것이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잠을 잘못 잤기 때문인지 어깨가 뻐근했다.
내 어깨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밧드의 모험에는 정말 그런 노인이 나온다.
다리로 신밧드의 목을 감고 절대 떨어지지 않는 괴물 같은 노인.
신밧드는 할 수 없이 그 노인에게 목을 졸린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
마치 요즘의 내 생활처럼.

그런데 신밧드가 어떻게 그 노인에게서 풀려났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 풀려났지.
어떻게 신밧드는 계속 모험을 떠날 수 있었지?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

오후에는 우산을 쓰고 비 내리는 거리를 걸어서 목욕탕에 갔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은 걸어서 십 분 정도 거리에 있다.
가까운 곳에도 목욕탕이 있지만
그곳은 온탕과 냉탕 모두 너무 좁아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널찍한 곳이 좋다.
좁은 곳에 갇혀 있는 물은 싫다.

나는 따뜻한 물에 잠겨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 시간만큼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위안을 얻는다.
인간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위안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위안이다.

나는 물에 잠겨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잃어 버린 꿈들에 대한 생각,
예전에 알던 여자들에 대한 생각,
그 여자들과 나누었던 사랑의 기억, 
어째서 지금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의 역사와 종말에 대한 생각,
심해 생물들,
나는 한 번도 심해 생물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대로 물에 잠겨 한없이 흘러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것에 대해 생각을 했다.
물과 함께 흘러가는 것.
아마 열 살도 채 되기 전의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것을 동경했다.
물과 함께 흘러가는 것.

목욕탕을 나왔을 때는 이미 비가 그쳤다.
나는 접은 우산을 손에 쥐고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느 여고에서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떡볶이를 가득 담은 종이컵을 들고 걷는 여자애들도 있었다.

어느 분식집 앞을 지날 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한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분식집 아주머니는 빨갛게 양념이 된 닭발을 비닐 봉지에 담고 있었다.
검은 단발머리에 흰색의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자애였다.
호기심 넘치는 까만 눈동자였다.

교복을 입은 여자애들과 눈이 마주치면 괜히 가슴이 뛰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의 얘기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지금은...

갑자기 매운 닭발이 먹고 싶어졌다.
혀가 타는 것처럼 매운 닭발.
나는 지나치게 매운 음식은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은 참을 수 없이 먹고 싶어졌다.
사람 많은 거리 한복판에 서서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결국 닭발을 사서 비닐 봉지를 손에 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골목길은 오전 내내 내린 비에 젖어 있었다.

문득 어느 좁은 골목길에 꽃잎들이 가득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벚꽃처럼 얇고 하얀 꽃잎들이었다.
어느 이름 모를 봄꽃일까.

꽃잎은 골목 안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골목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지만
나는 야릇한 호기심에 그 골목으로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골목을 둘러싼 담벼락은 높았고
그 위로 연둣빛 무성한 나무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꽃잎을 따라 안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이 점점 많아졌다.
서울의 주택가 한복판에 이렇게 많은 나무를 키우는 집들이 있다는 사실이 약간 놀라웠다.

하지만 담 위로 언뜻언뜻 나타나는 집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람이 떠나 버리고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들처럼 보였다.
마치 오래된 추억 같은 집들이었다.

골목이 갈수록 조금씩 좁아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제법 걸어 들어갔는데도 골목은 다른 골목과 이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하늘에서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기 속으로 살랑살랑 흔들리며 떨어지는 꽃잎.

처음에는 몇 개의 꽃잎들이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꽃잎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리고 마치 하루 종일 내리는 비처럼 꽃잎들이 꾸준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우산을 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초록색 우산이다.

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한 여자에게서 받은 우산이었다.
갑자기 비가 내렸던 어느 날 밤이었다.

우산 위로 끝없이 꽃잎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한 번씩 우산을 흔들어 꽃잎들을 털어 냈다.
골목에는 꽃잎들이 잔뜩 쌓여 가고 있었다.

마침내 골목은 급한 오르막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 오르막의 끝에 펼쳐져 있는 파란 하늘을 보았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보았던 그 파란 하늘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짭짤한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었다.

더 이상 꽃잎의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우산을 접었다.
어느새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 나오자
눈부신 하늘 아래 바다가 나타났다.
바다는 유리알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는 닭발이 담긴 비닐 봉지를 손에 쥔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잊은 채
그저 바다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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