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남 캐릭터 예찬

2011.02.02 03:41

산체 조회 수:4470

불과 몇년전만 해도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내가 뭐가 못나서 연애를 못하고 있는거야. 나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알 수가 있었지요. 마음 먹어도 안되는건 안되는거고요, 객관적으로 연애를 할 수 있을만한 능력 혹은 매력이 없어서, 즉 못나서 이러고 있는 거죠.

 

 

이 지경이 오래 지속되다보니 묘한 자조 및 자학, 자괴가 습관이 되고 결국 이 상황을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의 이러한 취향은 책이나 만화 등에서 저와 같은 캐릭터를 만나면 엄청나게 반갑고 신나는 반응을 하게 되는 부작용을 불러 일으켰는데요,

이러한 배경에서 제가 좋아하는, 그리고 사랑하는 찌질남 캐릭터들에 대해 끄적여보겠습니다.

 

 

제가 규정하는 저와 비슷한 찌질남들은 대략적으로 다음의 조건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1) 연애를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캐릭터들입니다.

연애를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는 크죠. 듀게에서도 가끔 그런 글을 봅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은 없는데, 연애하는 것도 이젠 귀찮고 딱히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런 상태는 연애를 안하는 상태입니다. 제가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종류의 상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연애하는 사람들보다 더 부러워요. 제가 처해있는, 그리고 제가 앞으로 이야기할 캐릭터들이 처해있는 상황은, 여자를 정말로 만나고 싶고 연애를 하고 싶은데, 솔직한 말로 발정이 났는데 능력이 부족해서 그걸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게 잘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가엽고 불쌍한 상황이지만 이야기 전개 방식에 따라 코믹한 상황들을 여럿 연출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2)비교적 자기 자신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하며,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근자감이라는 말이 있죠. 어떤 자신감을 가질만한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끝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꾸미는 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근자감을 가지고 있는 실존인물들은 결국에 가서는, 최소한 연애에 있어서는 성공을 하는 경우가 많은거 같아요. 자신감 자체가 엄청난 매력인거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그리고 제가 사랑하는 캐릭터들은, 근거가 없으면 자신감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두려워 위축되는거죠. 안그래도 어려운데 총체적인 난국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활약하는 작품들이 꽤 많아요. 

 

제가 첫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가장 좋아하는 친구들은 , 이제는 개그만화는 때려친 것으로 보이는 후루야 미노루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들 입니다. 대표적으로 그린힐의 오카(대머리 할리라이더)와 낮비의 안도(청소부 스토커)입니다. 이 친구들은 매우 쉽게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어떻게 해보려고 발악을 하는데 일이 생각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들이 이성 관계에 있어서 어설프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냥 이들이 성적 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천성이 착해서 이들과 친구가 되면 나쁘지 않을거 같아요. 하지만 연인은 다르죠. 매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후루야 미노루는 이 두 캐릭터 모두에게 꼼수를 씁니다. 작품 막판쯤에 가서 걍 하늘에서 떨어진 예쁜 여자친구를 안겨주는거에요. 후루야 미노루는 '이거봐라. 너네한테도 언젠가 이런 여자가 떨어질 지 누가 알아?'라는 의도에서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우리도 살만큼 살았는데 그런건 알잖아요. 만화는 만화고 현실은 현실이죠. 차라리 로또 1등에 당첨되는게 더 실감나는 이야기겠네요.

 

두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건 박민규 작품속에 등장하는 몇몇 남성들 입니다. 제가 볼 때 박민규와 후루야 미노루는 핵심적인 어떤 부분에서 정서적으로 매우 유사한거 같아요. 몇몇 상황들에서, 박민규 소설에 대사들을 등장인물들에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캐릭터가 겹치는 것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제가 많이 공감했던 캐릭터들은 비교적 최근작인 '아침의 문'과 '근처'에 나온 주인공들 입니다. 이 아저씨들은 위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게... 발정이 났다기 보다는,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삶의 대한 애착 자체가 거의 없지만,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 준다면 나도 이 하찮은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거죠. 이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일인칭으로 이루어지는 몇몇 문장들에서, 저는 제 마음을 읽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경험을 했답니다. 문학적 완성도니 예술성이니 다 떠나서, 그 이유 때문에 박민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세번째는 백가흠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들이에요. 듀게에서는 별로 언급이 안된거 같은데 제가 요새 가장 좋아하고 또 주목하는 젊은 남성 작가입니다. 조대리의 트렁크는 가히 제 인생의 책이라고 할만하고요. 어디까지나 제 경우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만, 조대리의 트렁크 단편집에 실린 소설을 읽을 때 저는 그 작품들이 픽션으로 보이지가 않더라고요. 그냥 내 이야기, 혹은 내 주변에 이야기들을 바로 내 시점에서 기록한 소설인 것 같았습니다. 소설 하나하나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 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저와 싱크로율이 높았던건 '루시의 연인'에 나오는 주인공이었습니다. 사실 이 친구는 별 문제가 없었어야 할 남성이죠. 하지만 소설의 설정상, 그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몸도 마음도 비틀린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실 저는 몸이야 말짱하지만, 그래도 그 친구가 보이는 행태가 너무 정겨웠어요. 남들이 보면 내가 하는 짓이 저럴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고.

 

네번째는 얼마전에 읽은, 브라이언 스테이블포드가 쓴 '어느 성화학자의 생애'의 주인공인 조반니 카사노바 입니다. 이름 자체에서부터 작정하고 이름 관련한 개그를 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데, 그 이름과 어울려서 전개되는 이야기도 참 우습고 재미있어요. 이 주인공의 경우는 위 캐릭터들과는 달리 장점이라고 할만한게 있죠. 머리도 좋고 재능을 이용해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외모나 성격에서 별 볼일 없었던 그는,  그것보다 더 치명적이게도 이성을 대할 때 어설펐던 그는, 연애 문제와 관련해 숱한 좌절을 겪습니다. 문체가 좀 건조하고 주인공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더 코믹하게 전달이 되는데,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아저씨도 참 불쌍한 삶을 삽니다. 문체로만 봤을 때, 듀나님의 히스 올 댓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글쓰기가 나름 전통이 있는건가봐요.

 

 

더 생각해보면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저런 캐릭터가 많겠죠. 그래도 실제로 저런 사람을 만나면 나랑 너무 비슷해서 피할것 같습니다. 기분 나쁠거 같아요. 하지만 픽션에서 만날 때는 너무 반갑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만 병신은 아닌걸. 나처럼 사는 사람들도 또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 심정적으로 좀 편해져요. 쉽지는 않은 인생이지만 그들도 그 방면에서 편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혼자는 슬프고 외롭고 안타깝지만, 그래서 혼자가 되기 싫지만, 그래도 이렇게 사는 것도 인생이죠.

 

조동진씨가 하나음악 프로젝트 앨범 '바다'에 대해 코멘트 하시는 도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무 좋아하는 말이라 글을 마치며 옮겨 봅니다.

 

"몇 번을 다시 들어보아도 수영 팬티나 땡땡이 옷을 걸치고 백사장을 달려가는, 그런 바다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실패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패란 성공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실패 그 자체로 완전하다. 실패한 노래도 노래이며, 실패한 삶도 삶이기에..."

 

 

그럼요. 실패한 삶도 삶인걸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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