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에 가까운 가사노동력

2011.02.05 20:52

Koudelka 조회 수:3277

    외국에 있을 때 무척 친하게 지냈던 지인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억대 연봉을 받으며 외국계 회사 임원을 지낸 커리어우먼이었죠. 불철주야로 바쁘게 일만 하고 살다가 갑자기 무한(?)의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 외국생활에서 그이는 이제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가사노동과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로 우울증 비슷한 것을 앓을 지경이었더랬죠. 심지어 그이는 집안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결혼을 했고, 남편은 여지껏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너무 덤덤하게 말해서(차라리 뻐기는 말투였거나 그랬으면 짜증이 났을 법도 한데) 놀랄 지경이었거든요. 집안 곳곳에 먼지구덩이가 굴러다니고 설거지감이 쌓이고 세탁물이 넘쳐나도 그이는 손을 대지 않는다고 했어요. 하는 거라곤 그저 세끼 밥과 약간의 요리, 그리고 아이를 돌보는 정도. '가사노동의 원죄'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할 정도로 그 부분에 대한 스트레스가 그렇게 심한 사람은 처음 봤지요. 처음엔 그게 잘난 여자가 잘난값 하느라 그런 건가 싶은 삐딱한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가까이 지내보니 더없이 인간적인 사람이고 썩 괜찮은 사람이었는데도 극복 안 되거나 타협 안 되는 일 중 하나가 그것이었던가 봐요.    

 

    ... .... 남말 할 거 뭐 있나요? 가사노동에 대한 재능은 저 역시 백치에 가깝습니다. 전 정말 너무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고(사실 하고 싶지도 않아요-_-). 외국생활 할 때, 진짜 주부 9단들 틈에서 살림의 여왕들이 벌이는 사투를 너무 가까운 데서 지켜볼 때마다 저는 혀를 내둘렀거든요. 사실 그 분야가 은근히 또 암투와 경쟁이 살벌한 곳이라 내로라 음식 좀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음식 맛볼 때 맛있단 말 절대 안해주죠. 재테크, 아이를 일류대 보내는 법, 남편 승진 시키는 법, 이런 건 오히려 제게 너무 실감도 안나는 일이었고 되려 기억이 남는 건, 흰빨래를 눈부시도록 희게 빠는 법, 음식물 쓰레기를 냄새 하나도 안나고 완벽하게 처리하는 법, 손에 닿지 않는 창틀의 먼지까지 말끔하게 닦는 법, 욕실을 무균실처럼 청결하게 유지하는 법, 한 가지 재료로도 열 가지 이상의 레시피가 가능한 메뉴를 개발하는 것 기타등등 기타등등.    

 

     김치 하나를 썰어도 싱크대가 벌겋게 물들고, 반찬통 한 귀퉁이는 늘 덜 닫혀서 들떠 있고,  청소를 해도 뒹구는 돌처럼 먼지뭉텅이가 나오죠. 뭔가 늘 쏟고 흘리고 떨어뜨리고 깨고 놓칩니다, 저는. 예전엔 덜렁대는 성격이라 그런가 싶었던 일이 고질적인 게 되니 이게 또 은근 스트레스고요. 냉장고 청소를 cf에 나오는 수준으로 하고 사는 여자들, 집안을 유리알처럼 해놓고 사는 여자들, 베이킹에 능하고 손재주 좋은 여자들, 효재나 마사 스튜어트 뺨치게 살림 잘 하는 여자들 볼 때마다, 이젠 한숨이 나와요. 부럽다기보다는... 많이 복잡힌 심경이 들죠.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음식의 간을 기막히게 잘 맞춘다는 것 정도? 어떤 음식이든 한 번 먹어보면 2% 부족해도 흉내는 낸다는 것? 김치를 잘 담는다는 것? 하하. 어디 명함을 내밀 수도 없는 수준이지만요. 어쨌든 저는 요리와 설거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하면 단연 요리에요. 몇 십인분 요리라면 밤을 새고서라도 할 용의도 열정도 있는데 설거지 하라고 하면 절망. 이걸 이렇게 말하는 건 심한 비약이지만 제가 문제해결능력이 떨어지는 창의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_-. 아, 빨래는 좋아해요. 광범위하게는 옷마다의 소재와 특성에 맞춰 케어하고 보관하는 일이죠. 신발도 마찬가지. 가방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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