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소설] 전화적 그녀

2011.03.15 22:06

catgotmy 조회 수:2255

  민방위 훈련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왠지 요즘엔 이 소리를 들으면 티비를 켜거나 인터넷을 보게 된다. 원래 나오는 효과음인지 우연인지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폭격은 아닐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상황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정이 누나에게서 전화가 온다. 채팅으로 알게 된 서너 살 많은 사람이다. 난 태어난 연도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대학원에서 집에 가는 길에 나에게 전화를 하는데, 길거리의 고양이가 귀엽다거나, 사람이 많지 않은 거리라서 무섭다는 얘기를 한다.

 

“길고양이 잡아서 누나 집에 갈까요?”

 

“ㅇㅇ. 잡아서 데려와.”

 

 내가 말해놓고 무리라는 둥 쭈뼛쭈뼛, 썰렁한 농담과 약간의 호감을 갖고 한참 전화하다가, 집에 다 왔다고 해서 잘 들어가라며 끊고 방으로 돌아왔다.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를 열면 누나가 이미 들어와 있다. 잡담을 계속 하다가, 오프에서 보자는 얘기도 하고, 말해놓고 또 미적미적 대다보니 잘 시간이 다 됐다.

 

“넌 모르겠지만, 지구는 대 위기야.”

 

“급전개인데요.”

 

“정말이야. 난 지구를 구할 마지막 희망이야.”

 

“에에~”

 

“널 위해 구해줄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

 

 다음날부터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통화 연결음은 나오지만 받질 않아서 세 번 정도 걸어본 후 다시 걸지 않았다. 문자도 두어 번 보낸 것 같다. 특이한 성이라 싸이월드에서 검색해봤는데, ‘사랑한다는 말은 상대방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글이 있었다.

  사오개월이 지났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전화가 왔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내냐고 인사를 했고, 그 사람도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친하게 굴었다. 세계가 구해진 건가. 아무래도 좋지만. 여전히 잡담을 하고,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고, 만날 약속을 잡은 다음날. 다시 사라졌다.

 다음번 민방위 훈련 사이렌이 울리던 날, 잠시 그 사람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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