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중풍의 맛

2010.06.21 22:13

셜록 조회 수:3642

중풍의 맛

 

 

어떤 고도로 발달한 혀와 후각을 가진 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가 인생을 맛본다면 어떤 맛이 날까? 인생에 대한 여러 정의들처럼 닝닝하기만 한 미원맛이 나지는 않을런지. 가끔 차라리 먹지 않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인생의 정체가 아닐까. 그런 고민보다는 라면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더 의미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종종 라면의 정의는 무엇일까 생각해보곤 한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다이어트 하면서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여자친구에게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그래?” “난 라면은 먹지 않아.” “전에 너희 집 싱크대에서 너구리를 봤는데?” 그러자 여자친구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너구리는 라면이 아냐!” 임제 선사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으면 이런 기분이 들까? 나는 선적인 세계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라면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너, 너구리는? 너구리는 뭐니?” 생각보다 빠른 대답. “너구리는 우동이야.” 참으로 명백한 대답이었다. 오컴의 면도날이 이리 예리할까? “그렇다면 짜파게티는?“ 여자친구가 답했다. “짜파게티는, 음, 짜파게티는, 짜파게티야.” 나는 생각했다. ‘아니 이 사람 천잰가?’ 그렇다. 그런 법이다. 오로지 자기 스스로 정의될 뿐, 다른 정의를 거부하는 존재가 세상에 있는 것이다. 가끔씩 그런 사실을 잊고 또 다른 해석적 의미를 부여하고 분류적 가지치기를 해야만 하는 인간이 문제일 따름이다. 굳이 너구리와 짜파게티 둘 다 라면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튀긴 면이 곧 라면이라고 포괄적인 정의를 내리면 된다. 그렇다면 생라면은? 튀긴 면이 아닌데도 라면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멸치칼국수는? 대놓고 칼국수라는데? 이쯤 되면 내 머리통 속에 들어있는 것이 뇌라는 것인지, 아니면 불어터진 라면가락들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러라고 라면이 만들어진 게 아닐텐데. 워워, 다시 인생에선 무슨 맛이 날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허나 그 질문으로 돌아간들 답이 있을 리 만무하다. 아마도 이 소설은 인생에 대한 소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그럴까? 제기랄, 나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러니 다시 라면 얘기나 해보자. 라면에 계란을 풀어 넣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괜찮다. 그렇게 먹는 것은 라면의 형편없는 영양소를 보충하기에 좋은 방식이다. 하지만 문제는, 왜 너구리에도 계란을 집어넣어야만 하냐는 것이다. 말했듯이, 자기 스스로 빛나는 존재들에게 별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폭력적이다. 가령, 밤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다. 어느날 망원경으로 관찰했더니 우리가 생각해왔던 그 별모양이 아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들이 그 별로 날아가 시멘트 구조물로 뾰족뾰족하게 별모양을 만들어버린다. 그러니 너구리에 계란을 풀어넣는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짜파게티에 계란이라니. 무서운 일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말을 말자. 그냥 그 사람들의 탐미적 식생활을 존중하는 편이 여러 모로 나을 것이다. 하긴 나도 오래전에 이상한 계산법을 라면을 끓이는 데 동원한 적이 있지 않던가. ‘맛있는 것‘ 더하기 ‘맛있는 것‘은 ’정말 맛있는 것‘이라는 공식 말이다. 그래서 라면에 야쿠르트 다섯 개를 넣고 끓였더랬지. 난생 처음 해보는 요리에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양은냄비를 포크로 휘휘 젓고 처음 맛본 그 라면의 맛은..., 아 씨발. 나는 그 일곱 살이었던 어느 오후, 세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쓰레기 배출구에 라면이 든 냄비를 던져버렸다. 사람이 살다보면 일곱 살에도 중풍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경험으로 인해 나는 음식을 만드는 데 조심하는 편이다. 물론 가끔 인생을 엎질러버리는 느낌의 요리를 만들게 될 때는 있다. 우유에 넣고 끓인 라면은 왜 크림스파게티랑 비슷한 맛도 나지 않는 건지 아직 의아하다. 끓인 우유에 담긴 라면의 기름내. 세상에 그보다 정직한 맛이 존재할까 싶다. 이렇게 정직할 필요는 없는데 중얼대면서 싱크대에 냄비를 엎었다. 소중한 야쿠르트는 그렇게 처참하게 라면과 결합하고 변질되어 버렸는데, 우유는 왜 그리도 겉도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전에 나온 식상한 조리법을 참고하지 않고 끔찍하게 새로운 라면 조리법을 만들어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맛의 오체투지. 진정한 중풍의 맛을 알게 되면, 인생이라는 것에서는 어떤 맛이 나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은 마트에서 바나나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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