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일기의 초반, 좁은 방 침대에는 친구가, 바닥에는 형사님이 만취해 뻗어있는 걸 주인공이 이불을 끌어 덮어주는 장면이 있었어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내 24시간을 이 영화나 이창동 영화의 시선처럼 여과없이 리얼하게 카메라로 담아낸다면, 사람들은 내 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이게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뇌리에서 가시질 않아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옆자리 싸부에게 물었습니다.

 

-음,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쟤 좀 불쌍하다, 이렇게 생각할 것 같지 않아?

-(피식)장난해? 무슨 소릴 하는거야, 니 방에 있는 책들이며, 최신형 컴퓨터며, 다락에 잔뜩 있는 구두며, 아 그래 넌 드럼세탁기도 있는 여자잖아(두달 전에 장ㅋ만ㅋ)그거 다 뭔데 그럼. 오늘 저녁도 그르케 비싼 밥 먹고 말이야. 웬.

-어-으하하, 어, 그런가. 그릏다. 난 우리 루이죠지도 너끈히 먹여살리고 그것도 모자라 집밖 꼬맹이랑 길냥이들도 먹여주고 있지, 음하하.

-그래, 또-직장도 있지, 친구도 많지.

--_-치, 친구는... 벨로 없어-.-암시롱.

-그리고 때 맞춰 반찬 만들어줘 가끔씩 설거지랑 빨래 해줘, 우렁아찌도 있지. 그리고 신나게 술퍼마시다가 지 새끼 잃어버리고 찾아다니는거, 시트콤이지(작년에 술마시다 문열어놓고 가서 죠지 가출한 사건-_-;;).

-응;;;;;;;;;;;;;;;;;; 그래그래. 그르네. 흐엉.

 

    그르치, 나랑 영화의 그가 비교대상이 될 리 만무한데, 빤히 아는데도, 왠지 저는 애인과 헤어져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걸으며 괜히 땅바닥을 툭 찼어요. 후져, 에이 후지다, 툭툭. 짜증섞인 혼잣말이 나오더군요.

    집에 가니 이쁜 내새끼들 둘이 아르르륽 목을 울리며 뛰어나와 반겨주는데, 배를 간질이며 같이 뒹굴며 반갑게 인사하는데, 그제서야 왜 내가 후지다, 고 얘기해야만 했는지 깨달았어요. 순리대로라면 언젠간 저도 잠든 우리 애들의 주검을 넘어서, 완연히 혼자가 된 채로 휘적휘적 남은 생을 마저 걸어가야겠죠. 혈혈단신 혼자인 게 그리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내가 싫건 싫지 않건 나는 무산無産이고, 지금보다 더 혼자가 되는 때를 언젠가는 감당해 내야만 한다는 명징한 사실을 급작스레 주지해 버려서 더럭 짜증이 치밀었던 거예요.  

 

 

 

   앞은 쓸데없는 혼잣말이었으니 패스하시구.

   어떤 창작물이 저한테 미치는 영향 중 가장 반가운 피드백이 그림그리고 싶어지는 건데, 오늘이 딱 그래서 밤잠 좀 포기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어요.

   이 사람이 여태껏 그리고 싶어했던 사람 중, 가장 못생긴 사람일 거예요. 확실히 미남보단, 그리기가 힘들더군요. 지치고 슬픈 눈에 일말의 동경을 담아 쇼윈도를 넘겨보던 옆모습과 구부정 둥그렇고 지쳐 보이는 뒷모습도 그리고 싶었는데 시간상 패스.

 

   사실 이 영화에 개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개가 어느 장면에서건 죽게 될 거란 걸 예감했어요. 그림 그린 저 부분에서 깡패들이 주인공에게 달려들때 개를 어떻게 할까봐 진짜 등줄기가 빳빳해졌는데, 어찌저찌 미뤄졌다 엔딩씬에서 죽는군요. 주인공이 저지른 사건의 인과관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단지 우연한 실수에 의해 느닷없이. 사실 가장 효과적인 불행은 조금 안도하고 한숨 돌린 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법이죠.

   박복한 생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기만 하다가 마침내 가장 당하고 싶지 않았던 종류의 불행마저 남김없이 퍼부어지는 그 순간, 기력을 소진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불행이 마치 없던 것인 양, 풀린 다리로 눈을 감고 불행을 지나쳐 휘적휘적 걸어가는 것뿐이죠. 어쨌거나 생은 가차없이 이어지므로.

   이런 종류의 쥐어짜임이 어째 익숙하다 했더니 엔딩크레딧에 이창동 이름이 나오데요, 감독이랑 사제관계쯤 되나요?'ㅗ'(노래방은 오마쥬?ㅎㅎ)

 

 +) 영화에 등장한 백구는 감독이 모란시장에서 젤 착해보이는 애로 데리고 온 아인데, 영화가 끝난 후 강원도 부모님 집에서 산짐승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는 후일담이...좋은 연기 고마웠어 백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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