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음악을 잘 아는 사람도 아니고 하지만 그냥 대중음악을 듣는 대중의 일원으로서 제 느낌을 좀 써보고 싶습니다.

 

원곡을 망친다와 원곡을 잘 해석했다 의 차이는 어디 있을까요?

나가수라는 무대 자체가 음반을 통해서 두고두고 듣는 되새김질의 여운이 표를 얻는 무대가 아니라 극적이고 고양된 느낌을 줄 수 있는 능력을 뽐내는 자리의 성격이 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저도 다양한 감성의 노래와 실험들이 반갑습니다만 이건 청중평가단의 수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감성적 반응이란 게 본능적으로 그런 거겠죠. 한때 오페라 하면 콜로라투라 였던 거랑 비슷한 게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옥주현의 천일동안은 참 훌륭한 편곡이었다고 봤습니다. 옥주현의 강점을 잘 살렸고, 원곡의 멜로디 라인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과하지 않은 유려한 장식음들로 솜씨좋게 헤드폰용 노래를 무대용 노래로 변화시켜서 (뭐 승환옹도 라이브에선 음반처럼 안부르니까..) 막판에 지르기까지 넘어가는 과정을 매끄럽게 처리했다고 봤어요. 개인적으론 윤밴을 1위로 꼽았지만 옥주현 끝나자마자 1위는 거의 확실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개인적 감상이고.. 옥주현의 천일동안이 이승환의 천일동안보다 우월한 해석인가? 아니면 더 호소력있는 노래였나? 단연코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뭐 문제일까요.

 

돌이켜보건대, 나가수의 '레전드 무대'들 중 원곡을 망치지 않은 편곡이 뭐가 있었을까요.

김범수의 제발 은 이른바 노래기계 김범수의 강점을 극대화시키는 편곡으로 히트했고, 이소라의 제발 이 갖는 절박한 호소력은 애초에 기대한 사람도 없었을 겁니다. 이소라의 'no.1' 은 훌륭했지만 보아의 담백하고 절제된 슬픔은 일단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고 시작한 것이고요. 임재범의 '빈잔' 을 인터넷 방송으로 다시보기하고 있을 때 임재범을 몰랐던 아버지는 옆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애들은 저 노래를 저렇게 부르는구나."

 

그밖에 어제 무대들을 생각해 보면 BMK는 냉정히 말해 자기 감정에 묻혀 해석도 전달도 못하고 그냥 목청만 높였던 최악의 무대였고 .. (사연 모르는 시선에서 본다면 그렇단 얘깁니다. 다음에 본모습 보여주시길. 그대 내게 다시 참 좋았어요. 아름다운 강산은 영 아니었고.) 그나마 평가가 좋았던 박정현은 제가 보기엔 원곡의 정서와의 괴리가 옥주현보다 몇만배 더 심했습니다. 비유 막 던져 보자면 머라이어 캐리가 기형도 시 읊는 기분이었달까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80년대의 한국이란 물리적 시공간에 실존하지 않은 사람이 유재하의 노래를 (음악적으로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머 그런 생각이 들게 하는.

 

지르기로 바꾸면 땡이냐, 네 옥주현은 나가수에 맞춰 진성 지르기를 필살기로 준비했죠.. 뭐 그게 어떻습니까. 20년 가수 인생에 처음 느껴보는 압박감 속에서 손을 벌벌 떨며 You're my lady 를 진성지르기한 김건모의 진정성이 계속 회자되고 있는데. 인터넷에서 '옥'자만 봐도 놀란다며 백만 안티 앞에 마음을 열어 주세요 라고 청원한 옥주현이 온몸을 떨며 올라와서 천일동안을 진성지르기한 거나 뭐 그리 대단한 전략적, 질적 차이가 있었는지 전 잘 모르겠어요.

 

 

글 곳곳에 제가 무리수를 좀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제 느낌은 그렇습니다. 나가수는 매 무대 원곡들을 망쳐왔다, 물론 그때마다 원곡의 열혈팬들은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원곡이 어디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딱히 듀게만 보고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이번엔 유독 원곡 망쳤다는 반응이 강하다, 좀 이해가 안간다...  그냥 마음에 안들었으면 난 별로였다 말하면 그만이지 지금까지 다른 가수들의 원곡 망치기 퍼레이드를 잘 구경해 오다가 여기서 갑자기 원곡 망쳤다는 소리가 높아진 까닭이 멀까...  손가락이 좀 근질근질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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