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가 같은 반 아이에게서 전자기기를 샀어요. 열아홉 살입니다. 아이 부모는 안 된다고 했고, 아이는 할머니를 졸라 돈을 받아냅니다. (부모가 첫 번째로 화난 시점.)
서울의 조부모 댁에 살고 있는데 마침 지방에서 일하는 부모가 서울에 와 있었고, 할머니가 돈 주는 시간과 조카가 친구에게 약속한 시간이 어긋났던 모양입니다. 조카는 자기 부모 가방에서 돈을 꺼내 우선 그 물건을 사서 할머니가 준 돈으로 채워 넣었는데 그게 티가 났지요. (두 번째로 화난 시점.)


부모가 사건의 전말을 안 것은 돈이 없어진 걸 알면서였으니까 화가 날 만도 했지요. 화가 날 만 했던데다가 본래 욱하는 성격이 있어서 해댄 모양이에요. 조카는 저더러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씩씩댑니다. 원래는 저한테 편들어 달라고 꺼낸 이야기였지요.

돈을 마음대로 꺼낸 것은 도둑질이라고 했지만 정말 다시 채워 넣을 생각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으니까 도둑질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위치를 바꿔 놓는 사소한 일이라도 남의 물건에 손대는 것은 나쁘고, 이건 비록 다시 돌려 넣었더다도 네 마음대로 남의 돈을 우선 쓴 거니까 그보다 더 나쁘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 버릇하면 죄책감이 점점 옅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라고 해 줬는데 제대로 말해 준 건지 모르겠군요.

할머니한테 돈을 받아 산 것이 잘못이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사실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부모가 준 용돈이었다면 일단 네 돈이니까 네 마음대로 사도 된다고 본다. 그렇지만 부모 의견을 물었을 때 사줄 수 없다고 한 건 부모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텐데 너는 문제를 네 부모를 설득해서 해결하지 않고 제삼자를 끌어들여서 우회했다. 내가 보기에도 네 부모가 반대할 이유가 있는데 넌 그걸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아주 쉽게 묵살해 버렸다.  (조카는 비슷한 용도의 기기를 이미 가지고 있어요. 게다가 무어든 손에 들어오면 매우 -네, 매우- 험하게 다루어서 사흘 정도면 어딘가를 고장내 버립니다. 얘한테 필기구를 빌려 주면 바로 그 자리서 망가뜨리죠. 제가 얘 부모라도 물건 사주기 싫을 것 같아요. ) ...이것이 제가 해 준 이야기였는데 뭐 할머니를 끌어들일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어? 하는 생각이 한 편으론 들더군요. 아이 생일이기도 했어요.

저는 돈 쓴 건 많이, 할머니한테 뜯어낸 건 조금 잘못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카는 굉장히 화가 나 있어요.
정 물건 돌려주기 싫으면 네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 인정하고, 그 물건이 굉장히 가지고 싶다고 말하라고 했는데 조카는 자기가 잘못한 부분이 없답니다. 저까지 편을 안 들어줘서 설상가상 마음의 상처를 받은 모양이고요. -_-

저야 십만 원 한 장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고, 그 녀석이 휙휙 망가뜨려버리는 샤프 하나 값도 어디서 거저 나오는 게 아닌 것을 알고 있는 기성세대니 아무래도 애 부모 입장에서 사건을 더 나쁘게 볼 수도 있는 거죠. 특히 할머니한테 받아냈다는 부분에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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