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raven님의 성의있는 논의 정리 감사드립니다. 지난 번 글에 답변을 달아주신걸 보고 열심히 재 답변을 쓰다가 넥센 히어로즈가 롯데 자이언츠에게 허무하게 역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하여튼 다시 한 번 논의를 이어가보도록 하죠.


일단 저는 raven님께서 "과학의 변화는 비합리적이다"라고 주장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raven님의 글에 단 댓글들은 raven님께서 저에 대해 지적하신 내용들에 대한 반론이었지, 그 반론들을 통해 raven님의 입장을 유추하려거나 그 입장에 모순이 있음을 보이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반론은 크게 두 가지 내용에 관한 것인데 제가 글을 쓸 때에는 그 두 내용을 별개로 생각하고 썼습니다. 왜냐하면 raven님께서 지적하신 내용이 두 가지 별개의 내용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거든요. 혹시나 제 글을 보시고 raven님의 입장에 대한 반론으로 여기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명확하게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과학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과학 외적인 요소의 개입이 필수적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제가 다음에 시간 날 때 따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건 논쟁의 형식보다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풀어내는게 훨씬 재미있을거 같아요.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이 에딩턴의 도움을 받아 상대성 이론으로 고전 역학을 전복시키는 과정이라든지, 호킹이 정상상태이론에서 빅뱅 이론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루어내는 과정은, 과학자들 혹은 천재들이 어떻게 새로운 이론을 주도적인 것으로 만드는지 알아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사례들이기 때문이에요. 무엇보다도, 드라마틱 하죠. 얼마나 드라마틱하면 BBC에서 드라마로 만들었겠습니까.... 하여튼 저는 제가 위에서 제시한 두 사례가 가장 대표적인, 현대 물리학에서 일어난 페러다임의 전환 사례이면서 동시에 과학 외적 요소의 개입없이 이루어진 패러다임 전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기약해보죠.




이 글에서는 이론 적재성에 관해서만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도대체 이론 적재성이라는게 뭐냐. 그리고 이론 적재성의 상황에서 이론의 참이 어떻게 결정 나느냐에 대해 이야기해 보지요.


제가 논하려고 하는 이론 적재성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의미합니다. 즉 A라는 이론은 그 이론을 성립하게 만드는 이론적 틀 내에서만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는 겁니다. 다른 이론의 틀을 가지고 와서는  A라는 이론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죠. B라는 개념체계 내에서는 A라는 이론은 틀린 이론이 아니라 이상한 이론이 되는 겁니다. 그 가장 주된 이유는 B라는 이론에서 특정한 개념이 정의되는 방식과 A라는 이론에서 개념이 정의되는 방식이 상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C라는 개념에 대해 C라는 같은 언어적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도, A라는 이론틀과 B라는 이론틀에서 C가 전혀 다른 개념일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지난번 글에서 사용한 C와 같은 개념의 예는 '지구'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나 케플러 이전의,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지구나 땅 같은게 움직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지구'라는 개념 속에는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 의하면,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천동설적 패러다임에서 '지구는 움직인다'는 지동설적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틀린 이론을 옳은 이론이 대체하게 되는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니까요. 



번역이 개판이기로 소문난, 김명자 선생님의 번역본인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참고 하겠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들이 옛 것들로부터 탄생된 것이므로, 그것들은 보통 전통적 패러다임이 이전에 사용해왔던 개념적이며 조작적인 용어와 장치의 많은 부분을 포함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차용한 이 요소들을 전통적 방식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옛 용어, 개념, 실험은 서로서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두 경쟁적 학파들간의 오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공간이 "휘어 있을"리가 없기 때문에-공간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비웃어 넘겼던 보통 사람을 단순히 틀렸다거나 잘못 생각했다고 할 수는 없다. 아인슈타인 이론을 유클리드식으로 전개하려고 들었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들도 틀렸던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공간이 의미했던 것은 반드시 평평하고 동질적이고 균등성이며, 물질의 존재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뉴턴 물리학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우주로의 이행을 위해서는, 그 요소를 공간, 시간, 물질, 힘 등으로 하는 전반적 개념상의 조직 체계가 변형되어야 했고, 다시 전체로서 자연에 놓여져야만 했다.



아무래도 잘못은 분명히 저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는 제가 진리에 있어서 상대주의자인지 잘 모릅니다. 사실 그게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진리가 상대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를 하자면, 쿤이나 포퍼, 파이어아벤트 등이 전개한 과학 합리성에 대한 논의 보다는 더밋이나 퍼트남, 데이비슨 등이 전개했던 '참'에 대한 논의에 따라 생각해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라고 여기는 입장입니다.(그리고 이 세 철학자들의 논의는 너무 어려워서 제가 이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론적재성등의 개념을 운운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특정 이론이 옳은지 아닌지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이 가정하고 있는 개념틀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개념을 끌고 오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김리벌님의 주류에 대한 강조가 넌센스한게 아니란 말이죠. 주류 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틀이 있고, 그 개념틀을 사용하지 않는 학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김리벌님의 주장을 "주류 경제학자들은 장하준의 논의가 자신들의 개념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라 여긴다"로 읽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렇게 여길 수 있는 근거를 이론적재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하려 했던 것이고요.



아무래도 이러한 오해는 제 입장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잘못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저는 학문이라는 것이 결국 패러다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패러다임이 있어야 그 안에서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고 믿는거죠. 여기서 말하는 패러다임이란 제가 위에서 누차 강조한, 어떤 이론의 참 거짓 뿐 아니라, 그 이론에서 다루어지는 개념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표준적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연구자들 간의 네트워크입니다. 커밍아웃을 하자면 저는 분석철학 전공입니다. 분석철학 중에서도 형이상학을 주로 공부했고 양상문맥의 해석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사실 아는건 쥐뿔도 없습니다. 이러한 분석 철학에서 '존재자'라는 말은 규정하는 것과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존재자'라는 말을 규정하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분석철학에서 존재자는 논리학적으로 봤을 때, 단칭어(singular term)나 변항(variable)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대상입니다. 반면 하이데거 철학에서는 (사실 저는 이 내용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데 네이버 철학의 숲에서 긁어왔습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 존재자가 각기 이미 그것으로 이해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아주 다양한 의미로 ‘존재한다’고 명명하고 있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우리가 의미하고 있는 것, 그것과 우리가 이렇게 또는 저렇게 관계 맺고 있는 것 등 그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 자신이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 것도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어떤 이론이 객관적인 참이라고 말할 때, "존재자의 존재는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라는 문장 자체가 참이 된다는 말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저 문장은 하이데거 철학이 개념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이해 될 때 객관적으로 참이 되는거죠. 저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저러한 문장에 대해 참이다 거짓이다라는 판단 자체를 내리지 않죠. 할 수 없는 겁니다. 그 쪽에서 어떤 방식으로 개념을 사용하는지 모르니까요. 기껏해야. 그거 뭐야. 몰라. 이상해. 무서워. 정도로 말하는거죠. 반대로 하이데거를 전공하신 분들 입장에서도 단칭어가 어쩌고, 변항이 어쩌고 하는 제가 사용하는 방식의 존재니 존재자니 하는 말을 들으면, 그게 옳다 그르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런 식으로 존재를 규정하는건 정말 쓸모없는 짓이며 존재를 이해하는데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에 관한 두 철학은 서로 소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저 존재에 관한 두 철학 중 객관적으로 어떤 철학은 맞았고, 어떤 철학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실제로 학문활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거고요. 존재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리고 그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보여주는 두 철학이지만, 그 두 철학이 전개되는 목적이 전혀 다릅니다. 분석철학 같은 경우에는 존재라는 개념을 형식화시키고, 그 개념이 다른 개념이나 대상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탐구하는게 학문의 주된 목적이라면, 하이데거 철학의 주된 목적은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과 더 나은 삶을 위한 모색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저는 김리벌님께서 말씀하신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취사 선택이 가능한거라고 본겁니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의 목적이 자본의 흐름을 더 잘 읽어내고 예측하려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고, 다른 경제학자들은 재화가 가장 효율적으로 쓰이는 방법이 무엇인지 탐구하는게 경제학의 목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두 다른 경제학자들은 그들의 학문의 목적에 따라 다른 학문을 전개하겠죠. 아마 두 경제학 모두에서 '이윤' '무역'이라는 개념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두 개념이 똑같은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위에서 설명한 개념이 이론 적재적이라는 의미에서요. 그 차원에서 두 경제학 중 어떤 것을 선호할지는 연구자 개인의 경제학을 하는 목적에 따라 달려있을 수 있는 겁니다. 두 경제학 중 뭐가 옳을까요? 둘 다 옳겠죠. 하지만 서로 소통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맨처음 논의에 뛰어들면서 쓴 글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제 주장을 전개하기 위한 것 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입장에서 논문이나 교제들을 보다보면, 어떤 논문은 우와 진짜 이 논문을 쓴 사람은 천재이며 이 논의는 이 판의 발전을 선도할만한 통찰을 보이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논문은, 뭐랄까, 진짜 이상한 경우가 있어요. 이 때 이 논문이 더 열심히 봐서 이걸 이해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대충 넘어가야 할지 결정하는 하나의 판단 기준이 김리벌님께서 말씀하신 주류의 연구 현황에 호소하는 겁니다. 내가 이해를 못했지만 리퍼런스에 많이 인용이 되고 다른 학자들의 논의에 자주 언급되는 논문은 더 열심히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그 논문의 내용이 옳다 그르다랑은 별 관련이 없어요. 어떤 논문은 그 논문이 틀렸다는 반론만 수십가지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그 논문에 제시된 논증은 틀린 논증이겠죠. 하지만 그 논증은 그 패러다임의 개념틀에 맞게 구성이 되며 해당 논의에 관한 심도있는 통찰을 담고 있을 개연성이 높습니다. 그 경우 그 논문은 비록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좋은 논문입니다. 연구자 네트워크를 활성화 시키고 그것에 대한 반론을 통해 학문 전체가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제 생각에는 제논의 역설이 이 사례에 적용됩니다. 제논의 역설을 다룬 논의들 중 제논의 논증이 옳다고 주장하는 건 못봤습니다. 상식적인 관점에서 제논의 역설에서 제시된 논증은 분명 틀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밝히려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학문적 시도들이 이루어졌고, 그 논의들은 해당 주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제논의 역설은 틀린 논증이지만 매우매우 좋은 논증입니다.

그런데 주류 연구 데이터 베이스에서 검색해 봤을 때, 리퍼런스로 별반 사용되지 않는 논문일 경우에는, 그 논문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이 별로 새로울게 없거나(근데 단지 새롭지 않을 뿐 패러다임을 준수하고 있다면, 제가 그 논문을 읽고 이상하게 여길 개연성은 낮습니다. 했던 얘기 또 하고 있네, 라고 생각하겠죠.) 아예 기존 패러다임과는 다른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길 수 있는 겁니다. 이 경우에는 진짜 이 논증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는 둘째치고, 그냥 잘 모르는거죠. 위에서 말한 의미에서요. 이런 주류에 호소하는 방식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건 아닐겁니다. 판 이동설이라든지 멘델의 유전법칙 등도 이론이 처음 제기된 시점에서는 기존의 연구 패러다임과 너무 달라서 주류 연구 대상에서 배제 되었죠. 하지만 결국 이 이론들이 정말 중요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었다면 주류 연구에서도 다루어지는 날이 올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분명 주류 연구 데이터 베이스에만 의존하는 방식은 공부하는 방법 중 매우 게으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게 꽤 효율적인 방법중 하나라는 거죠. 그냥 뭔가 그럴 듯해서 살펴봤는데 그게 기존 개념틀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면, 학문적으로 어떤 결정적인 이유가 없는 이상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저는 그러한 논의나 이론들이 틀렸다거나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하는 작업과는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하이데거 존재론이 나와는 다른 것처럼. 제가 원래 하고 싶던 말은 이거였습니다. 사실 진리의 상대론적 논점과는 별 상관이 없죠.


하여튼 제가 이런 식으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제가 주장하려는 맥락을 조금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제시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이런 오해가 생긴거 같아서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립니다. 귀찮으시겠지만 이러한 저의 맥락을 고려한 상태에서 저의 처음 글을 읽어보시면 아마 그 글을 내용을 제가 의도한 대로 이해하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raven님께 사과드립니다.





제가 처음 쓴 글을 통해 의도한 바는 밝힌 것 같고....


사실 이번 raven님의 반론에 대해 제가 더 성실하게 대답할 의무가 있는 것은 이론적재적인 과학 이론이 어떻게 과학자들에 의해 뒤집히게 되느냐라는 부분인데...

제가 지난번 까지는 제가 완전히 쿤주의자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했었지만, 사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상황을 평가하는 맥락에서는 저는 쿤주의자가 아닙니다.


쿤은 제가 위에서 설명한 방식대로 상황을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제 해석이 지나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쿤은 제가 설명한 의미에서 상대주의자가 맞습니다. 그 근거는 제가 위에 인용해 놓은 쿤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raven님께서는 개념은 상대적으로 불변하기 때문에 이론들간의 진리치를 따질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시지만 최소한 쿤은 그런 입장에 동의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쿤은 패러다임에 따라 개념이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쿤 입장에서는 지동설이라는 옳은 이론이 천동설이라는 틀린 이론을 대체한게 아닙니다. 두 이론은 통약불가능(incommensurable)하고 어떤 이론이 옳은 지는 그 이론이 가정하고 있는 개념틀 내에서만 판정 가능한데, 패러다임이 이동하는건 그 개념틀 자체가 전면적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과학자들도 마치 개종하듯 이 패러다임에서 저 패러다임으로 갈아타기 때문에 이후 과학이 이전 과학보다 실재를 더 반영하지는 않는다고 쿤은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저는 "과학 혁명의 구조" 마지막 부분이 쿤의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역시 개판이라고 소문난 김명자씨의 번역본에 따르면 "그러나 그 문제-인간이 그것을 알 수 있으려면 세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는 이 에세이에서 새삼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아직 대답하지 못하고 남아있다"라고 쿤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과학이 탐구하는 자연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현재 과학이 예전과학보다 더 잘 밝히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 같습니다. 쿤이 이런 식으로 주장하는 이유는 그가 콰인의 홀리즘(holism)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둥 이런 저런 얘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쨌건 간에 쿤이 개념이 사용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 어떤 문제가 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건 쿤만의 문제라기 보다는 러셀 식의 기술이론을 받아들였던 분석철학자들 전체의 문제죠.


쿤이 지동설이 천동설보다 옳은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지동설과 천동설에서 사용되는 '지구'라는 표현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건 러셀식 기술이론을 그대로 적용시킨 결과인데, 러셀식 기술이론에 따르면, 지구라는 고유이름(proper name)은 천동설의 경우 "지구={푸르다,T},{움직인다,F}...."를 만족시키는 위장된 한정 기술구 입니다. 그리고 지동설에 있어서는 지구라는 표현을 만족시키는 함수값이 달라지겠죠. 그렇게 되면 천동설에서 "지구가 돌지 않는다"라는 문장과 지동설에서 "지구가 돈다"는 문장은 양립될 수 있는게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지구라는 표현의 의미가 다르니까요. 그러니까 "지은이는 노란머리다"와 "지은이는 노란머리가 아니다"라는 문장에 있어서, 두 문장에서 '지은이'가 동일인물을 가리킨다면 저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이 될 수 없죠. 하지만 처음 문장의 지은이는 시크릿의 송지은이고 후자 문장의 지은이는 아이유 이지은이라면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이 될 수 있습니다. 러셀이 단칭어를 이해한 방식에 따르면 쿤도 '지구'를 저런 식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를 완성한 시점은 1962년 입니다. 그런데 크립키가 고유 이름을 고정지시어 처리 해버리면서 러셀의 기술이론은, 좀 격한 표현이긴 합니다만, 개박살이 납니다. (개박살이 났다고 해서 러셀이나 그의 논의가 하찮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기술이론을 전개한 On Denoting은 세계 지성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걸작입니다. 철학적 논의에서 중요한건 결과보다는 통찰이니까요.) 크립키가 러셀식 기술이론에서 자신의 고정지시어 이론으로 전환을 선포하고 그것이 보편화 된 시점을 이름과 필연이 출판된 1980년으로 본다면, 쿤이 지구가 고정지시어라는걸 몰랐다는게 그의 잘못은 아니죠. 자기 전공도 아니고.


이러한 해석을 제가 독창적으로 제시한건 물론 아니고, 어떤 논문에서 봤는데 그 논문이 어떤 건지는 적어놓지 않았네요. 이건 참 안좋은 습관입니다. 하지만 그걸 보고 감동먹어서 논문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놓은게 있는데 첨부하겠습니다.

(이 요약은 제 관점이 1g도 들어가지 않은, 단지 번역과 요약임을 밝힙니다)


기술 지시 이론(descriptivist theory of reference)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1. 일상적인 능력이 있는 화자는 어떤 기술(description)을 용어 t와 관련시킨다. 이 기술은 일련의 속성을 규정한다.

2. 어떤 대상은, 단일하게 혹은 그것과 가장 잘 관련된 기술을 만족한다면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t의 지시체이다.


그리고 쿤과 파이어아벤트는 위와 같은 기술 지시 이론적인 관점에서 과학의 진보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step 1. 실제적 지시 이론의 가정: '질량'같은 용어는 뉴튼의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다른 역할을 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정의되었다. 쿤과 파이어아벤트는 만약 이 용어들이 지시체를 가진다면, 반드시 관련된 정의를 만족하는 실제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step 2. 지시에 관한 주장: 쿤과 파이어아벤트는 이론적 용어들이 과학 혁명에 의해 근본적으로 수정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각각의 질량은 같은 크기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step 3. 철학적으로 중요한 결론: 과학 혁명의 기간동안 이론적 용어의 지시체가 변화하기 때문에 과학적 이론의 변화는 같은 실재에 대한 우리들의 지식의 진보에 기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적 진보란 없다.

그런데 Kripke와 Putnam등이 도입한 인과 역사적 지시 이론(causal historical theory of reference)을 받아들이게 되면 위와 같은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지시체가 '실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만족하는 기술과 결정적으로 관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과학적 비실재론과 실재론의 논쟁은 그들이 어떤 지시 이론을 지지하고 있느냐에 따라 갈리게 되는 문제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제 입장을 정리하자면... 저는 여전히 쿤의 이론 적재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과학이 발전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겠습니다. 쿤은 객관적인 차원에서 과학이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에 말했던 지구와 요새 말하는 지구가 다른 것이면 진보라는게 성립되지 않죠. 아예 다른 얘기를 하는거니까. raven님께서는 쿤에 대한 제 해석이 너무 지나치게 상대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제가 제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오히려 쿤의 그런 식의 상대주의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지구'를 고정지시어 처리하면 됩니다. 이건 쿤이 옳다 그르다에 대한 제 신념 때문이라기 보다는 제 귀가 얇기 때문입니다. 러셀도 최고의 철학자고 on denoting도 물론 훌륭한 논문이지만 저는 크립키 식의 직관이 더 그럴듯 한 것 같습니다. 러셀식 기술이론에 의존하고 있는 쿤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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