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사람들 이야기.

2011.07.06 00:34

은밀한 생 조회 수:2682

 

 

1.

집 근처에 맛있는 국숫집이 있어서 종종 저녁을 국수로 해결하곤 합니다.

전 김치와 양파등을 넣고 양념장으로 승부한 비빔 국수보다 양배추, 깻잎,숙주,김가루 등을 넣고 버무린 비빔 국수를 좋아해요.

김치 넣고 비빈 국수는 늘 먹던 김치 맛이 강하게 나는지라 , 새콤달콤 맵지만 지루한 맛이라서 안 좋아하죠.

게다가 김치 넣고 고추장 넣고 새콤달콤하게 비비는 국수라면 집에서도 얼마든지 해먹을 수가 있기 때문에,

국숫집 메뉴로써는 좀 서운한 구석이 있단 생각이에요.

여름이 되니까 그 국숫집에서 직접 갈아 만든 콩국수를 선보이고 있어요.

요즘은 분식집이나 중국집, 심지어는 국수 전문점에서도 콩국을 그냥 받아다 쓰는 경우가 많아서

콩국에 땅콩이나 다른 견과류의 맛이 나는 걸 선호하지 않는 저로서는 그 옛날 흔하던 '직접 맷돌로 갈아 만든 콩국수'에 대한

애착이 있어요. 국숫집 앞에 여름 메뉴 콩국수 개시! 라고 써 놓은 깃발 위에 '맷돌' 글자만 펄럭인다 하면 반색을 하며 들어가게 되죠.

그런데 저희 집 근처에 바로 직접 간 콩국수를 팔고 계시니 그냥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잘 먹고 있답니다.

콩국의 맛은 줄 서서 먹는 여의도의 유명한 콩국수집 맛처럼 진하고 고소한 건 아니지만, 맷돌로 간 콩국도 아니지만 그래도 맛있어요.

그 집은 돈까스도 직접 얼리지 않은 생고기를 계란에 입혀 튀김옷 조금 묻히는 가정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돈까스도 무척 맛있어요.

중국산 음식재료가 범람하고 대량 생산된 납품용 냉동 돈까스,튀김,만두 등이 점령하지 않았던 오래전의 경양식 돈까스 맛이랄까요.

빵으로 드릴까요 라이스로 드릴까요? 묻던 웨이터가 일하고 후식으로는 콜라 사이다 녹차 커피 있습니다 하던 그런 경양식집 돈까스요.

그렇게 돈까스 소스도 직접 만드시고 맛있게 튀겨낸 순살 돈까스가 5000원이라서 갈 때마다 왠지 불안해요.

남는 건 없고 힘들다고 메뉴를 없애시면 어떡하나..... 해서요. 그야말로 이런 걸 기우라고 하는 거겠죠? :-)

 

 

 

2.

그 국숫집에 자주 가게 되니, 국숫집에 오는 손님들 또한 자주 마주치고 있어요.

언젠가 갔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앉아서 국숫집 사장 부부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때 그 아주머니 얘기의 주제는 '남편을 잘 다루는 현명한 아내' 에 대한 거였는데.

부부학 개론을 열심히 설파하고 계시더군요. 형식은 부부학 개론이었지만 내용은 아주머니의 남편 다루기 스킬에 관한 자랑이었죠.

남편을 너무 닦달하면 안 된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결과적으로는 남편이 미안한 게 많아져서

늙었을 때 아내에게 잘하게 된다. 하지만 때리는 건 참으면 안된다. 우리 어머니 왈 한 대라도 손찌검하면 바로 전화해라

당장 이혼시키게. 라고 하셨다......기타 등등.

재밌는 건 그 아주머니의 어머니에 관한 일화였는데 어느 날 남편이 (그 아주머니의 아버지) 노름판에서 집에 들어오자,

조용히 문을 열어주고서 남편이 방에 들어간 뒤 잽싸게 방문을 못으로 다 박아버리고 남편분의 노름 버릇을 고쳤단 얘기였어요.

오늘 그 아주머니께서 남편분과 국수를 드시러 오신 걸 봤습니다.

남편이 열무 국수를 먹겠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추 국수 먹어!"

남편이 또 열무 국수를 먹겠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더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추 국수 먹어!"

남편이 계속해서 열무 국수를 먹고 싶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더 강하고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부추는 몸에 좋잖아 부추로 먹어!!!!"

무척 무안한 얼굴로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부추 국수를 드시던 그 남편분은, 내내 표정이 어둡더라고요.

문득 먹고 싶은 열무 국수 한 그릇을 못 먹는 입장에 놓이는 부부 생활이란 건 과연 뭘까 싶었어요.

물론 저 같은 타인이 그들 부부의 행복 지수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어쩐지 알쏭달쏭해졌어요.

그 아주머니께서 생각하시는 남편을 잘 다루는 현명한 아내란 어떤 여자인가.

전 꽤 오래전부터 우리가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남편을 잘 다루는 현명한 아내'가, '아내를 잘 다루는 현명한 남편'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운이 좋아서 ..... 혹은 좋은 배우자(애인)의 성품을 알아채는 통찰력이 있기에 좋은 이성을 만나는 것으로 생각해오고 있어요. 

내가 뭘 잘해서 그 아름다운 사랑을 받았던 게 아니란 걸 말예요. 

그들은 애초에 누구를 만나도 따뜻한 미소를 변함없이 지어줄 사람들이었단 걸 말이죠.

 

 

 

3.

그렇게 국수를 먹고 집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 문자 메시지가 왔어요.

최근 회사 후배가 이직하게 돼서 송별회 날짜를 조율 중이거든요.

커피 마시면서 "**씨. 언제가 좋겠어요? 다음 주 금요일 괜찮아요?"라는 문자를 보냈죠.

국내 SKY대학 중의 한 군데를 나와 영문학을 전공한 그 후배께서 재빠르게 답장을 보내셨어요.

"네 괜찮아요 ㅎㅎ 그럼 이직 전까지 유정의 미를 거두도록 최선을 다할게여 ㅎㅎ"

 

유정의 미...... 유정. 정감있게 회사 생활을 마감하시겠다는 건가? 아님 유정란을 함께 아름답게 나눠먹잔 건가?

역시 맞춤법의 세계는 지식 학벌 성품과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배, 참 다정하고 됨됨이 좋고 남에게 피해 안 주려는 성정의 친구거든요.

 

아 유정의 미..... 유정의 미를 그녀와 꼭 거두고 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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