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켓의 요구 범위

2011.07.11 23:16

와구미 조회 수:1660

스포일러 논쟁을 보고 생각해봤는데 에티켓을 어느 수준까지 요구하느냐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서로가 가진 에티켓의 기준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그 기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에 진통이 안생길 수가 없습니다. 무작정 제일 민감한 사람의 기준에 맞추는 것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 될테고 그 반대면 피해보는 사람이 많이 생기겠죠.

스포일러의 합의된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스포일러 주의를 달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단지 제목에만 달고 쓰면 되는데 무슨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합의된 기준도 없는 상황에서 글을 쓸 때마다 스포일러 주의를 달아야 할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자유롭게 글을 쓰는 행동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한 때 게시판에서 논란이 됐던 아기 사진이나 건프라, 아이돌 같은 게시물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불쾌함이나 짜증을 느낍니다. 그렇다고 말머리를 달아달라고 했을 때 그 요구자체가 글 쓰는 일을 위축시키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스포일러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글을 썼는데(아킬레스나 트로이의 목마의 예처럼) 누군가가 스포일러라고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까지 고려하기 시작하면 글 쓰는걸 포기하고 싶을겁니다.

한편으로는 몇 분이 언급했듯이 말머리 하나 다는게 뭐가 힘든 일이냐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 행동의 수고성이 해당 에티켓을 지켜야 할 당위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에티켓을 지키는게 어려운 거라면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나요? 가령 10시간 넘게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가는 흡연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는 비좁은 공간에서 10시간 넘게 앉아서 흡연 욕구를 참는게 무엇보다 고역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에티켓을 지키는게 힘든 상황인데 그렇다고 흡연을 허용할 수는 없는거죠. 한 개인의 욕구를 허용함으로서 다수가 필연적으로 피해를 입는 상황이니까요.

비슷한 예로 최근에 논란이 됐던 지하철 매너손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요구가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샀던 이유는 그 행동이 힘들기 때문이 아닙니다(번거로울 수는 있죠). 극소수의 의도적 추행과 의도치 않은 접촉 행위 때문에 대다수의 남자들이 신체의 자유를 제약받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되기 때문이죠. 쩍벌남, 큰소리로 떠들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 신문을 크게 펼쳐 보는 사람 등은 주변사람들에게 명백한 피해를 유발하며 문제시에 단지 그 행동만 자제하면 되지만, 두손을 모으지 않는다고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피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 것에 비해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됩니다. 단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하기 때문에 요구하는 거라면 누군가의 말마따나 여성들의 하이힐도 신지 말아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하이힐에 찍히는 신체적 고통도 상당히 크거든요. 이런 사항에 대해서는 좁은 지하철에서는 본의 아니게 여성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으니 좀 더 조심을 해달라 정도로 그쳤어야 했는데 구체적으로 신체적 자유를 제한하는 식으로 요구를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거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스포일러 표시 요구와 지하철 매너손 요구는 비슷한 수준의 요구처럼 보이는데 듀게에서의 반응은 사뭇 다르네요.

중요한 건 개인의 자유를 너무 억압하는 형태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과, 미덕으로 취급받아야 할 행동(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을 행동이 아닌)은 강요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건 미덕이지,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례한 건 아니죠. 명백한 피해를 끼치지 않는 행위라면 다수의 자유를 제한하는 식의 에티켓 요구는 항상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737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590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5865
» 에티켓의 요구 범위 [4] 와구미 2011.07.11 1660
96841 보고 또 보고에서 금주 은주 누구 좋아하셨어요? [19] 소소가가 2011.07.11 6992
96840 오늘 미스 리플리 감상 [4] 미시레도라 2011.07.11 2180
96839 영어는 과연 논리적인가? [9] kinema1995 2011.07.11 2484
96838 이제 나가수 다 봤네요. 일단 제가 논쟁을 일으켰으니 이쯤에서라도 의견표명을 해야겠죠. (나가수 스포 조금) [3] nishi 2011.07.12 2622
96837 (바낭)번역 잡담 [7] 불별 2011.07.12 1536
96836 [자랑바낭] 헤드헌팅 업체로부터 콜을 받다!!! [8] soboo 2011.07.12 2877
96835 피판이 며칠 안 남았는데, [1] 안드레이 2011.07.12 1000
96834 [바낭] 교과서 소설 다시 읽기 [20] Serena 2011.07.12 2530
96833 [뜬금없이] 게리 올드먼. [3] 도로테 2011.07.12 2267
96832 아빠가 타고 있어요, 트랜스포머3 [1] AM. 4 2011.07.12 1336
96831 아이들이 순정마초를 무서워하는 이유 뭘까요? [6] 빠삐용 2011.07.12 4303
96830 장기하 좋아하는 분들만 봐주세요 [16] 안드레이 2011.07.12 3856
96829 이순신의 죽음과 스포일러 [12] 메피스토 2011.07.12 3023
96828 아.. 핸드폰이 skt인게 이렇게 후회되기는 처음이네요 [3] 물에빠진붕어빵 2011.07.12 3414
96827 페미니스트 잔다르크 [4] 가끔영화 2011.07.12 1989
96826 시나리오와 국가주의, 델토로의 미믹 감독판, 윤하 소속사 결별, 안노의 토토로, 알프스 가구, 약장수 베르히만, 어제 노을 사진. [8] mithrandir 2011.07.12 3536
96825 노원에 외국손님 마사지 받을만한 곳 있을까요. [4] Eun 2011.07.12 1978
96824 경향신문의 희망버스 일러스트와, 그저께 시사매거진 2580. [5] mithrandir 2011.07.12 3228
96823 철학자 출신 지휘자가 ‘차라투스트라’를 만났을 때 [3] 김원철 2011.07.12 182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