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 소설] A Walk To Remember

2011.07.29 19:09

catgotmy 조회 수:2744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10층까지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계속 하고 있는데, 여자 한 명이 나랑 같은 짓을 하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베이터걸 처럼. 엇갈리면서 흘끔흘끔 쳐다봤다.  차가운 옆모습을 보고 있으니 말을 걸어보고 싶어졌다. 10층에서 여자가 올라오길 기다렸다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죠?” “아뇨. 저. 커피라도 하실래요?” 티나게 귀찮아한다. “그럼, 커피만 마시고 내려가세요.” 편의점을 가리키면서 여자가 말한다. 그나마 맛있는 커피를 사고 돈은 내가 냈다.  나란히 서서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며 커피만 마시고 있다. 말을 걸었을 때의 반응으로 상황은 끝난 거였다. 지금 이 행동은 의미가 없다. 알고 있지만,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시고, 대충 인사를 하고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갔다.

  건물을 빠져나와서, 길거리를 걷는다. 여자 한 명이 내게로 걸어 온다. 그저 길거리에서 스쳐지나갈 뿐인 것 같지만. 뭔가에 취했는지, 풀린 눈에, 청결하지만 흐트러진 모습이다. 팔짱을 끼고, 공중전화박스로 나를 데려간다. 키스를 해 온다. 아무리 이쁘더라도 길거리에서 마주친 여자랑 말 한마디 없이 키스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막지는 않았다. 경찰이 막았다. 대충 얼버무리고 여자를 두고 자리를 피했다. 키스 때문에 경찰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다.

  근처 고층아파트로 갔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자 한 명이 옆에 선다. 잘나갈 것 같은, 흠잡을 데 없는 여자. 사실 얼굴이 이쁜 건 아니다. 처지와 상황에 따라서 어디든 잘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이랄까. 여자에게 말을 건다. “에.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 경계하면서 쳐다본다. “1억 드릴게요.” 고민하는 듯한 얼굴. “알았어요. 집에 들렀다 가죠.”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내린다. 2층에 내릴 거면서 왜 엘리베이터를 타는 거지.  하이힐 때문이겠지 뭐. 

  거실에 앉아 있으니, 쓰레기 정리를 한다. 분류하고 모으고 봉투에 넣고. 난 눈을 감고 있다.  “왜 눈을 계속 감고 있는 거죠?” 눈을 감은 채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집이란 곳은 보여도 안 보이는 척 해야 하는 곳이죠. 어차피 눈을 감아도 보이기도 하구요.” 뭔 헛소리를 하냐고 생각할 것 같다. 트레이닝 복 차림의 여자와 아파트를 나선다.

  우린 길거리를 걸어간다. 여자는 싱그럽게, 기분 좋게, 아이처럼 웃는다. 누군가 상냥하게 대하면 기분이 좋아서 그런 표정이 나오고, 좋게 대하면 잘해주려고 애쓰는, 대학생 때는 그런 성격이었을 것 같다고 말했는데,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미소를 띄고 있다. 그걸로 됐다. 웃는 얼굴을 봤으면 충분하다. 커피숍에 여자를 두고 도망쳤다.

  나와서 한참을 걷다 보니,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잘 모를지도 모르지만, 이런 곳에도 사람은 걸어 다닌다. 한산할 뿐이지 걸어 다니기 무서울 정도는 아니다. 무난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걸어간다. 뒤로 가서 안았다.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빼려고 한다. 지나가던 남자가 그걸 보고 돌로 날 친다. 돌이 모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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