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01 18:14
엄석대는 게으른 담임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반장으로서 온갖 불합리한 짓거리를 저질러 왔습니다.
시험지도 바꿔서 전교 1등, 그림도 바꿔 내서 미술 대회 1등, 아이들 등쳐먹고, 부려먹고, 괴롭혀도 반장이라 어쩔 수 없어요.
전학 온 한병태가 엄석대의 권위에 맞섰을 때, 한병태는 툭하면 위생 불량자의 명단에 오르고, 복장 위반자로 벌을 받고, 등하굣길의 군것질로 범죄자 취급받고, 만화가겔 몰래 가도 담임 귀에 들어가 혼납니다. 남들 다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도 엄청난 비행으로 공개 성토당하고, 회의 기록에도 남습니다.
한병태는 손톱도 늘 깎아 두어야 하고, 복장도 완벽해야 하고, 군것질은 물론 만화가게는 얼씬도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엄석대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단, 그게 옳은 일이니까요. 자신이 옳아야, 그른 놈 다그칠 자격이 생기니까요.
한병태가 비행을 저질렀다고 엄석대의 패거리가 떠들고 다닙니다. 소문이 파다해집니다. 공모자도 있답니다.
엄석대를 반대하던 친구들도 유독 소리높여 한병태를 비난합니다. 한병태이기에 기대한 게 있으니 실망도 크겠지요.
깨끗한 개인 줄 알았는데 겨가 묻었어요.
이번 기회에 다른 겨 묻은 개들도 조용히 조심조심 제 몸을 텁니다.
우리들은 오래 묵은 끔찍한 똥보다는 새로운 겨- 일부는 소문- 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학급 학생인 저는 며칠 혼란스런 날을 보냅니다.
겨가 묻은 한병태보다는 엄석대가 지휘하는 이 모든 상황에 울화가 치밀어요. 겨를 묻은 걸 깨끗하다는 게 아녜요.
겨를 따지고 겨를 터는 동안, 엄석대는 어마어마한 똥을 싸대고 있다는 게 열받을 뿐이에요.
한병태에게 벌을 주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엄석대가 가만 있어도 벌 주자고 난리이고, 그 통에 엄석대의 똥 얘기마저 다 묻히니 하는 말이에요.
한병태에게 벌을 주더라도 좀 진중할 순 없나요. 한병태 비행의 메가톤급 부정을 저질러온 엄석대, 단체로 좀 쏘아볼 순 없나요.
소문을 퍼뜨리는 엄석대 꼬붕들 좀 노려볼 순 없나요.
학급을 맘대로 주무르고 있는 엄석대보다, 엄석대가 바라는 그대로 반응하는 친구들을 보는 것이 더 편치가 않아요.
한병태의 겨를 벌주고 나서 엄석대의 똥은 벌 줄 수 있을까요.
호들갑을 떨며 엄석대 패거리를 흐뭇하게 만들기 보단, 이번 일을 제대로 엄정하게 처리하고 나서 제발 엄석대도 그 잣대로 좀 패 줄 순 있을까요.
처리하고나서가 아니라, 이 참에 엄석대가 시험지 가로채 1등 한 것도, 애들 등쳐먹은 것도 처리하자고 얘기하면 안 되나요?
엄석대 패에서 사퇴할 사람이 한 둘인가요?
우리 중에 누가 그치들 사퇴하라고 외칠 사람이 있나요? 한병태에게 하듯이 할 수 있을까요.
범죄에 가까운 정책과 사업들, 개각 행태들. 그런 일들엔 그냥 '내 그럴 줄 알았다'면서 이렇게 열렬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참 혼란스럽습니다.
한병태 겨를 눈감아주자는 건 아닙니다. 한병태가 잘못했다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선도부도 학생부도 엄석대 손아귀에 있지만, 원칙은 원칙이지요.
그 원칙이 다르게 적용되니 울화가 치밀지만요.
안 보이는 데서 낄낄거릴 엄석대를 떠올리니 홧병이 날 것 같지만요.
한병태에게 실망하랴, 엄석대에게 화내랴, 지쳐요, 지쳐.
이놈의 학급, 넌덜머리가 납니다.
+
손톱을 단정히 깎고, 만화와 군것질을 참고, 복장을 완벽하게 관리하면서 엄석대에게 맞서는 고상하고도 고단한 싸움에 지치는 느낌이에요.
밤길에 숨어 기다렸다가 퍽치기라도 하고픈 마음. (응?)
하지만, 힘을 내어 의연해져야겠지요.
엄석대가 꿈꾼다는 공정 학급이 안드로메다에 있을지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