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책을 공유한 이야기.

2011.09.02 23:31

passion simple 조회 수:1472

엄마는 종종 제 책장에서 책을 가져 가곤 합니다. 빌려가는 거 아녀여, 가져 갑니다. 훌쩍. (네 용돈은 내가 준 거야! 하면서)

고향 집에 있는 책들까진 잘 모르겠는데, 제가 알고있는 목록은 이 정도예요.

 

1.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제 자취방에 오셨다 가시는 길에, "이 책 빌려 간다?" 하면서 빽 안에 든 책을 보여줬을 때 좀 당황했더랬어요.

왜냐하면! 좀 야하지 않습니까 (...)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정도로 남녀 사이의 일들을 알긴 하지만. (으응?) 엄마에겐 제 그런 면을 들키고 싶지 않았어요.

순수와 거리가 먼 나이가 되어서도 부모님 앞에선 순수하게 비춰지고 싶은 부질 없는 욕심이랄까.

당당하게 반대할 이유가 없어서 어버버- 하다가 뺏겼습니다.

엄마의 감상은 별 거 없었어요. 이게 엄청 베스트셀러에 스테디셀러인데 나한텐 별로 안 다가오더라. 이 정도?

한 2-30년 전에 읽었으면 와닿지 않았을까? 하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아직 못 돌려받았어요. 훌쩍.

 

2. 생의 한 가운데 / 루이제 린저

이 책이, 엄마 여고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엄마는 그때 영 정을 못 붙였다면서 빌려 갔더랬습니다.

저는 되게 좋아하는 책이라 엄마도 재밌게 읽기를 바랐는데, 좀 지나서 물어보니 여전히 제대로 못 읽겠더래요. 글씨가 눈에 안 들어온다나.

대신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같이 루이제 린저 강연에 갔던 이야기를 해줬어요.

강연 내용이라곤 아무 것도 생각 안 나는데, 루이제 린저가 "생의 한 가운데는, 중심입니다!"하던 것만 생각난다고 하더군요. (30년도 더 전의 일, 통역 감안 하세요.)

그 때 엄마 친구 누구가 루이제 린저에게 팬레터와 선물을 줬었다는데. 독일에서 그 친구에게 답장이 날아왔대요. 친절한 루이제 린저.

 

3. 홋카이도 보통열차 / 오지은

제가 홍대마녀 오지은 빠순이라 샀던 오지은의 홋카이도 여행기예요.

홋카이도 여행기 + 가수 오지은의 이야기가 유쾌하고 진솔하게 담겨 있어서 좋아합니다.

엄마에게 내가 좋아하는 걸 왠지 들키기 싫은 기분 아세요? 상실의 시대와 다른 이유로 빌려주기 싫었어요.

네가 이 책을 산 돈도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란 논리로 빌려 가신 엄마는, 여행기를 기대했는데 여행정보는 별로 없다고 투덜투덜 감상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오지은의 여행 루트를 그대로 따라갈 거 아니라면, 여행 정보 목적으론 다른 책이 좋아요!

 

4. 피아노 치는 여자 / 엘프리데 옐리네크

이건 고향 집에 있던 책인데. 우연히 집에 내려갔다가, 엄마가 읽는 걸 봤어요.

자극적인 묘사가 많기도 하거니와, 모녀 간의 갈등이 담겨 있는 책이라 괜히 찝찝하더군요.

엄마 취향이 아니라 못 읽었을 것 같은데. 감상을 물어볼까 하다 관뒀어요.

어떤 책이든 자극적인 내용이 나오는 건, 읽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요.

이제 19금을 훌쩍 넘은 나이인데도 엄마 앞에선 잘못하는 기분이 드나 봅니다.

 

 

좀 전에 엄마랑 통화했는데, 대상포진에 걸렸대요. 엄느님 쾌차하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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