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게시판에 ABE(맞나요?)시리즈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저도 무척 끼고 싶었습니다만

전 그 시리즈 자체를 듀게에서 처음 들었기 때문에 바라만 보고 있었지요. 음.

그렇지만 어린 시절의 전집류가 주는 충만함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계몽사 전집이 그런 존재였거든요.

원작들의 삽화를 그대로 따온 듯한 그림들도 멋졌고, 스웨덴같은 먼 나라의 동화를 읽는 특유의 분위기도 좋았어요.

아무튼 책장 자리가 모자라서 전집을 홀랑 고물장수에게 넘겨버린 게 몇 년 전입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 애인이 큰집에 갔다가 그곳에서 계몽사 전집을 발견했습니다!

절반은 파랑 표지/나머지는 빨강표지인 옛날 판은 아니었지만 뭐 그런게 대수인가요. 애인은 전집을 차에 싣고 귀환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특히 좋아하던 책 몇 권을 부탁해서 다시 손에 넣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다시 보고 있는데 나이 들면서 동심이 다 휘발됐는지 그 때 그 맛이 안나네요.

뭐 좀 유치하다거나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정도가 아니고 책을 읽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달까요.

 

먼저 에밀과 탐정 :

 

  시골 소년 에밀과 베를린 소년들이 힘을 합쳐 도둑놈을 잡는 과정이 포인트인 이 동화에서

저는 어린 소년들이 무슨 군대마냥 지휘하고 지휘받고 명령 기다리고 이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교수군 너는 나이도 비슷한 주제에 왜 명령을 내리고 난리여... 이런 생각만 들고

배경이 독일인데다 2차대전 전이라, 실존하지도 않는 등장인물들이 좀만 나이들면 소년병이 되겠군. 이런 잡생각까지 들더군요.

실제로 작가는 나치에 대항하다 망명한 지식인이었는데 말이죠.

 

다음으로 사랑의 집 :

 

  아이가 7명이나 되는 페플링 씨 집안의 이야기입니다. 화목하고 단합이 잘되며 가난해도 명랑한 뭐 그런 집안이죠.

이거 굉장히 좋아했던 책입니다. 저는 형제들 중 소심하면서 고집 센 넷째 아들 '플리이더'를 좋아했었어요.

근데 다시 읽으니 아버지 페플링 씨 좀 이상합니다.

책에는 계속 활발하고 쾌활한 남자라고 소개되는데 그냥 화 잘 내고 딱딱한 아저씨예요.

오죽하면 어린 동생이 사라져도 형들이 동생 걱정하는게 아니라 아버지가 짜증낼까봐 걱정합니까.

학기초에 문법책 사달라고 했을 땐 7명이 다 사달라고 하면 돈이 남아나냐고 거절했다가 학기말에는 왜 자기한테 이야기 안했냐고 화내고

너무 현실적인 캐릭터라서 오히려 웃음이 나온달까요.

어려서 읽을 때는 이 아저씨 이상한 걸 전혀 몰랐거든요.

 

마지막으로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 :

 

  제 동년배 중에 이 책 읽었던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 한국에서는 히트를 못 쳤을까요? 작가의 다른 작품인 삐삐도 유명한데 말이죠.

사실 어렸을 땐 제목이 저래서 저도 선뜻 손이 안 가던 책이긴 합니다만...  정말 제목대로  '고아'인 '라스무스'가 '방랑'하는 내용이거든요

그렇다고 엄마 찾아 삼만리 같은 느낌은 전혀 아니고 정 반대로 발랄하면서도 사려깊은 동화입니다.

진짜 린드그렌 씨는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다시 보면서 미소 짓게 되고 두근거리고 그러네요. 

특히 주인공 라스무스 캐릭터는 발군입니다.

악당을 해치우면 일반 남자애는 신나하거나 의기양양해 할테지만 라스무스는 무서워서 훌쩍거려요. 속이 안 좋아져서 토하고.

그의 짝인 오스칼(어른입니다)을 비롯해서 등장인물 모두 좋은 캐릭터고, 문장 하나하나마다 위트가 배어있습니다.

주변에 어린이가 있는 분은 이 책을 선물해 주세요. 적극 추천합니다.

계몽사 전집 얘기 쓰다가 라스무스 찬양으로 끝나네요. 그렇지만 그만큼 좋은 동화입니다.

린드그렌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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